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83-역사의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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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83-역사의 전승
  • 손호영
  • 승인 2022.08.1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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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인터넷에서 ‘○○동의 옛 모습’이라며, 여러 동네의 오래 전 사진을 게시한 시리즈 글을 만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오래 살던 동네가 나오는지 유심히 챙겨봤습니다. 드디어 나오자 반갑게 사진을 열었습니다. 조금 김이 샜습니다. ‘옛 모습’이라면서 ‘최근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게시글을 닫으려던 찰나, 반성적 고려를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옛’의 관념이 조금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네에 오랜 살던 사람은 20년, 30년 전을 보통 옛날이라고 합니다. 사진은 10년, 15년 전 풍경을 담았을 터입니다. 그 간극만큼 서로 ‘옛’을 다르게 보지 않았나 합니다.

한 동네에 꽤나 오래 살면, 그러니까 20년, 30년 정도 있다 보면, 동네의 역사를 보고 들어 알게 됩니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동네의 변천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서 알기도 하고, 사람의 바뀜을 통해서 알기도 합니다. 시간이 누적되면, 아파트촌이라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뀐 슈퍼나 마트를 오래 살던 사람들은 여전히 어렸을 때 부르던 그 이름으로 부릅니다. 예컨대, 이미 세련된 이름으로 탈바꿈한 ‘돼지 슈퍼’는 저와 친구들에게는 지금도 ‘돼지 슈퍼’입니다. 돼지 슈퍼 앞 공터에서 음료수를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주인이 여러 번 바뀐 마트 ‘농심가’는 이름도 당연히 변했습니다. 물론 이름이 변한 이후에도 심부름을 갈 때는 “농심가에 다녀와라.”는 말씀을 듣고, 잘 찾아갔습니다. 그때는 ‘농심가’가 마트의 총칭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람들도 바뀝니다. 보통 상인들의 변화가 눈에 뜨입니다. 어떤 부부는 처음에 트럭에서 분식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집에 가는 길에 튀김을 종종 사먹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부부는 과일행상으로 업을 바꾸었습니다. 과일이 좋아서 사람들이 찾았고, 부부는 동네 주민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어떤 분식 가게 사장님은 배달을 직접 하셨습니다. 동네를 걷다보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는 그 분이 잘 보였습니다. 옆 식당을 인수하시더니, 운영하시던 곳의 이름을 ‘○○분식’에서 ‘○○식당’으로 바꾸셨습니다. 여전히 잘 되신답니다. 어떤 분은 대여 책방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만화책이나 소설책을 300원, 500원 주고 빌려 봤습니다. 어느새 책방은 넘겨주시고 식자재 유통업으로 전환하시고 자리 잡으셨습니다.

상인들도 주민의 변화를 압니다. 안경점에 가면 항상 살갑게 제 안부를 물으시던 분은 제가 대학에 가자 자기 일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서점을 운영하시던 무뚝뚝하기 그지없으시던 분은(그래서 사모님이 더 대하기 편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어 다시 책을 사러 들르자, 이제 시험은 다 끝난 것이냐며 제 근황을 물으셨습니다. 동네의원 원장님 자제분은 제 고등학교 후배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후 찾아갔을 때는 더 반갑게 맞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한 동네에 오래 살다보면, 그 역사를 직접 겪게 됩니다. 그 동네의 변화를 속속들이 알고자 한다면, 깊이 있는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그 곳에서 오래 살던 사람의 말을 들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동네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럴진대, 다른 분야나 법조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지난 세대의 고민과 경험을 피상적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속내 깊은 이야기를 들어야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자세를 고쳐 잡아 이야기를 듣자 하니, 한 가지 전제를 확인하게 됩니다. ‘들을 이야기’가 먼저입니다.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이 일단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보면, 선배 법조인들을 새삼스레 다시 봅니다. 같은 교과서를 보고, 같은 판례를 본다 하더라도 이해의 깊이가 다르거나 시야의 트임이 다른 경우를 종종 봅니다. 사법제도나 법원의 정책에 대해서도 통찰의 폭이 다릅니다. 선배 법조인으로부터 조금씩 주워듣는 내용이 발표된 공식 내용의 충실한 주석이 되어 줍니다.

법원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옆에 탁월한 선배 법관들이 많기 때문에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근무연이 있어야지만 배움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직접 마주하지 못하면 그 분들의 소중한 경험과 생각들을 접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원로 법조인이 쓴 회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가 겪은 법조의 역사를 알게 되니 흥미로웠습니다. 선배 법조인의 회고는 당시 사회상을 일깨워주는 거시적 의미뿐만 아니라 개인의 고민과 내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 후배 법조인에게 울림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법조실록을 만들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판결이나 논문 이외에 법조의 역사를 적어가는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법조인으로서 제가 말하는 ‘옛’과 선배 법조인이 말하는 ‘옛’은 아마도 크게 다를 것입니다. 그 간극을 메우고, 역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서로 소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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