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81-‘깨끗한 정수기’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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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81-‘깨끗한 정수기’의 의무
  • 손호영
  • 승인 2022.08.0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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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정수기 제조 회사가 얼음정수기를 개발합니다. 판매하거나 임대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개시했고, 정기적으로 점검·관리받길 원하는 소비자에게 필터 교환과 탱크 청소 등 서비스를 제공하였습니다. 2015. 7.경 회사 직원은 얼음정수기 점검하던 중 냉수 탱크에서 은색 금속 물질을 발견합니다. 회사는 직원에게 내용을 보고 받은 뒤, 얼음정수기를 수거해 검사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펴보니, 얼음을 냉각하기 위해 사용되는 부품인 증발기 외부 니켈도금이 박리되어, 냉수 탱크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회사는 얼음정수기 19대를 자체적으로 검사하기 시작합니다. 일반 정수수와 얼음은 니켈성분이 검출되지 않았고, 냉수는 13대에서 검출되었으며 그 중 4대에서는 세계보건기구의 평생음용권고치 이상으로 니켈이 검출되었습니다.

회사는 조용히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발생 한 달 즈음 뒤, 니켈도금 박리 현상과, 니켈성분 검출을 막기 위해 회사가 생각한 방안은, 얼음정수기 증발기에 플라스틱 덮개를 장착하는 것입니다. 계획에 따라 회사는 점검·관리 서비스 과정에서 얼음정수기에 플라스틱 덮개를 장착합니다. 당연히 소비자는 의아합니다. “왜 플라스틱 덮개를 장착하나요?” 대답은 니켈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전기요금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또는 “내부 위생을 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회사는 처음 문제가 보고된 지 1년 정도 지나 2016. 5.경 자신의 대책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확인해봅니다. 플라스틱 덮개를 장착한 얼음정수기 1,010대를 살펴보니, 그 중 126대가 세계보건기구 평생음용권고치 이상 니켈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이제 언론이 나섭니다. 회사가 대책 결과를 확인한 지 두 달 뒤입니다. “얼음정수기에 은색 부스러기가 발생되었습니다. 중금속인 니켈이고, 회사는 알고 있었음에도 소비자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사과하고 약속합니다. “이 사건 얼음정수기를 단종하고 제품 전량을 회수하겠습니다. 사용료 전액을 환불하겠습니다. 최신 제품으로 교체하거나 해약금 없이 해약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니켈로 인해서 건강상 문제가 발생했다면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민관 합동조사반이 조사에 들어갑니다. 니켈도금이 떨어진 것은 냉각구조물의 구조·제조상 결함 때문입니다. 위해성은 낮은 수준으로 밝혀졌습니다. 다만 계속 사용하면 니켈 과민군의 피부염 등 위해 우려가 있으니 사용 중단은 권고했습니다. 회사는 얼음정수기 96%를 회수했고, 사용기간을 고려하면 위해 우려는 낮지만 민관 합동조사반 조사 결과를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소비자는 회사가 ‘니켈 박리 사실을 숨겼다.’는 것을 그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고, 2022. 5. 26. 대법원 판결이 나옵니다(2020다215124).

대법원의 판시는 이렇습니다. 회사와 소비자 사이의 계약은 얼음정수기 지속적 점검·관리를 내용으로 하는 계속적 계약임을 전제로, 약관과 품질보증서 등 내용을 고려해 소비자가 ‘건강을 위해 보다 높은 수준의 안전성이 확보된 깨끗한 물을 지속적으로 제공받을 것을 기대’했음을 인정하고, 회사는 얼음정수기에서 제공되는 물의 안전성과 신뢰성을 지속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면서, “중금속인 니켈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인체에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정이나 중금속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통념 등을 고려하면, 피고는 이 사건 얼음정수기에서 니켈도금이 박리되고 니켈성분이 검출된 사실을 원고들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피고는 이 사건 얼음정수기에서 니켈도금이 박리되고 니켈성분이 검출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 사건 얼음정수기 내부에 플라스틱 덮개를 장착하는 조치를 하였으면서도 원고들을 비롯한 소비자들에게 플라스틱 덮개를 장착하는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피고가 위와 같은 고지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소비자의 피해는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실 물에 관하여 선택권을 행사할 기회를 상실’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선택권의 침해로 소비자에게 발생한 정신적 손해의 위자료 액수는 100만 원이라고 판단합니다.

건강을 위해 애써 고른 제품입니다. 소비자는 이 제품, 저 제품을 면밀히 따진 후 회사를 신뢰하면서 얼음정수기를 골랐을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관리가 미흡할까 전문가인 회사에게 정기적으로 점검·관리까지 받습니다. 소비자는 ‘깨끗한 정수기’를 원했고 기대했고 믿었습니다. 회사는 신뢰를 저버렸습니다. 문제를 알고서 숨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발생 1년 뒤에 언론에서 나서니 그제야 사과를 했을 뿐입니다. 대법원 판결은 문제발생 약 7년 후에나 나왔습니다. 재판기간도 장장 6년입니다. 오랜 다툼 끝에 인정된 위자료는 그 존재와 액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을 위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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