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77-떠난 이의 삶 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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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77-떠난 이의 삶 반추
  • 손호영
  • 승인 2022.07.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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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뉴욕타임스의 부고(訃告) 모음집(Book of the Dead)은 단순히 해당 인물의 생물학적 죽음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물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고, 그의 생애를 요약, 정리하며 평하는 순으로 글이 마무리됩니다.

1851년부터 부고가 쌓여왔기에, 뉴욕타임스의 부고에는 역사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도 등장합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수상으로 철의 재상(Eiserner Kanzler)으로 불린 인물입니다. 탁월한 외교력으로 그가 디자인한 국제 구도는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1898. 7. 30. 세상을 떠나자 부고를 알립니다.

“재상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비스마르크였지만, 스스로는 권위에 짓눌리는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의 오만한 자세와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듯한 매서운 눈빛, 저음의 목소리와 도전적이면서도 빈정대는 말투”,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 것은 사실 당연했다.”,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온화하고 소년같이 유쾌하며,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면서 다정다감한 면이 있었다는 사실”, “지인들의 경우 무한한 찬사를 보냈던 반면, 독일 내 비스마르크의 정적들은...그가 독단적이고 피에 굶주린 사람이라며 그의 공적을 깎아내리곤 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이므로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고가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영향력이 이미 쇠진한 상태라면, 굳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지난 뉴욕타임스의 부고를 새삼 들여다보는 것은 고인이 된 인물을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상을 떠난 신하의 졸기(卒記)가 적혀 있습니다. 짧은 글부터 긴 글까지, 그의 생애나 인상 깊은 일화가 기재되어 있고, 세간의 여러 논의도 함께 알려주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신숙주는 그의 역량이 빼어남은 분명할지라도 갈림길에서 그가 택한 행보를 어떻게 볼지 여전히 논란입니다. 사관의 평은 과연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신숙주는 일찍이 중한 명망이 있어, 세종이 문종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국사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라고 하였고...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경은 나의 위징이다.’라고 하였고, 매양 큰 일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았다...그러나 세조를 섬김에는 승순(承順)만을 힘썼고, 예종조에는 형정이 공정함을 잃었는데 광구한 바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단점이다.”

세종대왕이 그를 일찍이 ‘국사를 맡을 만한 인물’이라 평했고, 세조가 그를 당나라 태종의 명신 위징에 빗대었을 만큼 뛰어난 인물임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성품을 곧다고 하지는 않고 명령에 부합하는 처세가 두드러졌다는 식의 평입니다. 사관의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다는 느낌은 지나친 것일까요. 적어도 실록의 졸기는 신숙주에 대한 일말의 솔직함이 적혀 있는 것 같아 살펴볼만 하다 생각합니다.

뉴욕타임스와 같은 언론이 아니더라도,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서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고인을 평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피천득 선생이 이광수를 기억하며 쓴 수필 <춘원>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복합적일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같이 생활한 시간으로나 정으로나 춘원과 가장 인연이 깊다...구태여 무얼 쓰랴마는, 마침 쓸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짧게나마 쓰고 싶은 생각이 난 것이다...춘원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다...그와 같이 종교, 철학, 문학에 걸쳐 해박한 교양을 가진 분은 매우 드물 것이다...그는 신부나 승려가 될 사람이었다. 동경 유학 시절에 길가의 관상쟁이가 그를 보고, 출가할 상이나 눈썹이 탁해서 속세에 산다고 하였다...그는 아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범하였었다.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지금 와서 그런 말은 해서 무엇하리.”

피천득 선생의 아호인 금아(琴兒)를 이광수가 붙여줄 정도로 둘은 깊은 친분이 있었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했습니다. 그는 이광수의 잘못된 선택을 두고 말을 아끼려 하면서도 그와의 인연에 대한 개인적 소회를 드러내는 한편, 그에게 ‘크나큰 과오’가 있다며 비판하기도 합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뒤섞인 여러 감정이, 착잡하게 전해집니다.

떠난 이들의 생을 반추하는 것은 타산지석이든, 반면교사이든 그들의 지나간 삶을 통해 우리가 삶의 방향성이나 지침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문수, 포청천, 장석지의 여러 일화를 정리해본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12번째 칼럼 <판관 포청천, 어사 박문수>, 41번째 칼럼 <법조인의 덕목> 참조). 현대 법률가의 삶도 의미 있는 일화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다 접근성이 높도록 정리되어, 서로 공유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의미 있는 통찰을 하면 좋겠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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