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75-매뉴얼의 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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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75-매뉴얼의 양면
  • 손호영
  • 승인 2022.06.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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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2007년도 특파원 기자의 칼럼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편의점 종업원은 물건을 계산할 때 “커피 OO엔, 생수 OO엔, 초콜렛 OO엔”이라고 부르고 손님을 쳐다봅니다. 손님이 돈을 건네면 큰 소리로 지폐를 세며, “OO엔, OO엔”이라고 한 뒤, 최종적으로 “OO엔 받았습니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거스름돈을 마찬가지로 세어 건넨 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라고 한다고 합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의외의 섬세한 환대입니다.

시내버스를 타면 이번에는 운전기사 차례입니다. 승객이 유모차를 끌고 들어오자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모차를 고정끈으로 단단히 묶은 뒤 출발합니다. 승객에게 맡기지 않고 운전석에서 일부러 일어나다니, 예상치 못한 따뜻한 대응입니다.

이상하다 느낀 것은 일본 어디가나 똑같은 태도를 접하고 나서입니다. 인사하고, 계산하고, 배웅하고 배려하는 것이 혹시 일본인의 내재된 친절이라고만 볼 수 있는 것일까. 특파원은 일본인의 부지런함 또는 친절함으로 포장될 수 있는 현실을, 이렇게 통찰합니다. “일본은 매뉴얼이 강한 나라다.”

2020년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이가 쓴 칼럼에서도 일본의 매뉴얼이 논의됩니다. 그도 ‘대학 캠퍼스에서 대지진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소형 매뉴얼 북’을 지갑 속에 항상 넣고 다녔다면서, 매뉴얼의 효율적 활용을 이야기합니다. 다만 그는 매뉴얼의 한계도 지적합니다. 코로나 사태에서 일본은 의료 기관에서 보건소로 정보를 보낼 때 팩스로 보냅니다. 아마도 매뉴얼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집계에 오류가 다수 발생합니다. 가계를 위해 지급하는 보조금도 온라인으로 신청 받지 않고 일일이 직접 데이터를 체크합니다. 아마도 매뉴얼 때문일 것입니다. 지급되기까지 하세월입니다. 겹겹이 쌓인 매뉴얼은 자칫 신속과 유연을 잃기 쉽습니다.

매뉴얼은 지도이고 순서도입니다. 모르는 분야를 처음 접할 때, 매뉴얼이 있으면 적응하기 편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업무를 접할 때는, 전임 판사가 남긴 인수인계서에 의지합니다. 판사들이 남기는 인수인계서에는 대체로 업무 프로세스에 맞게 무얼 하면 되고, 무얼 찾으면 되고, 무얼 고민하면 되는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할 때, 인수인계서는 낭랑히 저에게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여기에 법원에서 발간하는 실무서가 또 다른 매뉴얼의 역할을 하고, 교과서, 주석, 기존 판례들까지 더 공부하다보면 이제 업무를 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매뉴얼은 과거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매뉴얼은 지금까지 고민한 쟁점을 집대성해 이렇게 하자, 이렇게 하면 좋다는 논의의 결과입니다. 순서도를 짜고 지도를 그리는 것은 좋지만, 고정되기 쉽습니다. 상황이 변해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새로운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고, 머리가 좀 굵어지면 기존 매뉴얼에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순서도를 수정해야 될 때, 지도를 새로 그려야 될 때, 매뉴얼은 자칫 구속이 될 수 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님이 법조윤리 수업에서의 일화를 이야기합니다. 형사사건의 변호사 성공보수 약정은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토론을 붙이려고 했습니다. 대법원 판결(대법원 2015다200111 전합판결)은 이 판결을 통해 향후 성공보수약정은 민법 제103조에 의하여 무효라는 취지를 선언하였습니다.

“형사사건의 경우 성공보수약정에서 말하는 ‘성공’의 기준은 개별사건에서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합의에 따라 정해질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수사 단계에서는 불기소, 약식명령청구, 불구속 기소, 재판 단계에서는 구속영장청구의 기각 또는 구속된 피의자·피고인의 석방이나 무죄·벌금·집행유예 등과 같은 유리한 본안 판결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보수약정에서 정한 조건의 성취 여부는 형사절차의 요체이자 본질에 해당하는 인신구속이나 형벌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만약 형사사건에서 특정한 수사방향이나 재판의 결과를 ‘성공’으로 정하여 그 대가로 금전을 주고받기로 한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합의가, 형사사법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공정성·염결성이나 변호사에게 요구되는 공적 역할과 고도의 직업윤리를 기준으로 볼 때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국민들이 보편타당하다고 여기는 선량한 풍속 내지 건전한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수는 형사사건과 동일한 논점이 문제된 행정사건에서는 성공보수를 받아도 되고, 형사사건에서는 성공보수를 받지 못하는 이유와 그 정당화 논거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조심스럽게 답했다고 합니다. “대법원 판례가 형사사건에서 성공보수를 금지하니 이에 대해서는 받을 수 없고, 행정사건에서 성공보수를 금지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판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는, 판례의 경직된 매뉴얼화를 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판례가 우리의 법률가적 사고방식을 제어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됩니다. 그 일화를 듣고 칼럼에 기재한 교수님은 말합니다. “진정한 실무능력은 결코 판례를 암기하고 맹종하는 능력이 아니다.” 뻣뻣한 사고방식을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매뉴얼이 편리하다 할지라도, 그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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