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실적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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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실적 자유
  • 최용성
  • 승인 2022.06.03 11: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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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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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돈 되는 곳에 몰려든다. 금광에서 가상화폐 열풍까지 그 역사는 길다. 그러나 실제 돈 버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이 돈을 번다. 금광을 캐러 간 사람이 아니라 곡괭이나 청바지, 주류를 파는 사람들 말이다. 공무원 시험 열풍이 불면 학원이나 수험서 출판사의 통장 잔액이 두둑해지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정작 대다수 투자자는 큰 피해를 보기 일쑤이다. 1929년부터 미국에서 불붙어 서구 자본주의의 경제체제의 근간을 흔들었던 대공황 당시에도 그랬다. 대공황은 현상적으로 보면—실제 원인은 더 복잡하고 그 자체가 논쟁거리이다—과도한 주식투자 열풍에서 비롯되었다. 무리해 빚내서라도 집을 사려는 우리 시대 ‘영끌족’처럼 당시 많은 미국인이 빚내 주식을 샀다. 주식거래를 위한 대출금 총액이 당시 미국에 유통되던 통화량을 넘어설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해 9월 런던에서 시작된 주가 대폭락은 10월에 “검은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미국 월스트리트 주가 대폭락 사태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 서구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심각한 대공황을 겪게 된다. 실업, 빈곤, 우울과 무기력증, 자살, 그로 인한 사회와 가족공동체의 해체. 10여 년 동안 이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배급받기 위하여 긴 줄을 서야 했다. 이 시대를 감각적으로나마 이해하려면 찰리 채플린이 만든 불멸의 걸작 영화 <모던 타임스>를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대공황 시대의 아픔은 물론이고, 기계 부품으로 전락하여 소모되는 노동자의 모습,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연대와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적 상황 속에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유머가 담겨 있다.

위기의 시대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기도 한다.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라는 걸출한 대통령을 통하여 위기를 극복해나간다. 케인스 이론을 적용한 그의 뉴딜 정책, 반(反)독점 정책은—보수주의자들로부터 좌파, 공산주의 정책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도탄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루스벨트는 1941년 미국 의회 연설에서 유명한 네 가지 자유를 말한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종교적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전쟁)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이 중 주목할 것이 바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1944년의 연두 교서에서 구체화하듯이 경제적 안정과 독립이 있어야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는 인식의 표현이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사회권적 기본권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현명하게도 자유를 지고선으로 여기는 미국 사회에 맞춰, 사회권이라는 논쟁적 용어 대신에, 같은 내용을 자유로 개념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사회권을 보장하려면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부자의 재산권을 제한하여야 하고, 노동자에게 불리한 조건의 노동계약, 잘 나가는 기업의 독점행위나 소비자 착취행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갑질 거래, 공해 유발이나 재해를 초래하는 기업활동 등의 ‘자유’도 규제하여야 한다. 물론 사회권이 자유를 침해한다며, 자유 대 평등이 대립할 때 자유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자유는 사회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형사사건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등등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권은 경제적 안정과 독립 없이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려면, 거주이전의 자유를 실현하려면, 통신의 비밀을 보장받기 전에 통신하려면 우선 돈이 필요하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예술을 누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국가가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고 나의 현실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폐해로 소수에 독점되어 껍질만 남게 된 다수의 자유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하여 나타난 인권이 사회권이다. 그래서 사회권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이고, 명목만 남아 있던 자유를 현실에 구현시키는 ‘사실적 자유’이다. 사회권이 진정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은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새의 양 날개 같은 존재이다. 노동권을 포함하여 사회권을 줄이거나 억제하려는 시도는 늘 ‘규제개혁’ 또는 ‘기업 할 자유’라는 미명으로 포장되어 나타나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부를 더 강화하기 위하여 다수의 자유와 안전을 후퇴시키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권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이윤추구가 목표인 기업은, 자가 증식만 하는 자본은 우리 개개인의 인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인권을 지켜야 하는 국가권력이 기업 논리에 매몰되어 노동을 억압하고, 사람을 단순히 비용으로 계산하는 것을 용인하는 사회에는 인권의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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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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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22-06-07 02:05:15
엄청 좋은 글이군요....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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