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에세이(5)-이제 다시, 처음처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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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에세이(5)-이제 다시, 처음처럼 영원히
  • 안혜성 기자
  • 승인 2022.05.17 17: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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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변호사시험법은 로스쿨 수료 후 5년간 5회로 변호사시험 응시 기회를 제한하고 있으며 이는 로스쿨에 재입학해 수료를 해도 다시 응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는 절대적 응시 금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소위 오탈자들은 10년 여의 시간 동안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고도 법조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이에 사랑샘재단(이사장 오윤덕)은 제도의 사각에 놓인 오탈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 200만원의 마중물 지원금이 지급되며 지원금은 여행, 새로운 진로를 위한 공부를 비롯한 다양한 경험과 활동 등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지원 대상자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약속이 되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전을 결심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경험과 사색 등을 담은 에세이 1편을 1개월 내에 사랑샘재단에 제출하면 된다. 에세이의 형식이나 길이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으며 익명으로도 참여가 가능하다.

지원금 신청 시에는 ①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 참여 동기 또는 계획의 요지를 기재한 신청서 1통(사랑샘재단 홈페이지 소정양식) ② 로스쿨 석사 학위증 등 변호사시험 평생응시금지 해당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 ③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 사본 ④ 온라인 송금 수령 계좌번호 ⑤ 에세이가 익명으로 발표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이를 사전에 신청서에 기재해야 한다.

사랑샘재단의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에 관해 문의사항이나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메일 ydoh-law@hanmail.net, 전화 02-3474-5300으로 연락을 하면 된다. -편집자 주

<이제 다시, 처음처럼 영원히>

-박재윤

안녕하세요? 박재윤이라고 합니다. 저는 법학전문대학원 1기 출신으로, 이번 달(글 작성일 : 2022년 2월 23일)로 로스쿨을 졸업한 지 만 10년이 되었습니다. 사랑샘 재단의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 참여를 계기로, 본 에세이를 작성합니다.

이제 와 지난 10여 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니, 새삼스럽네요…. 또한 제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합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의 자기 푸념에 불과한 글이나,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가볍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대한 있는 사실 그대로 작성하려고 노력했으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희미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제 자신에 대한 글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왜곡된 부분이 분명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 부분을 감안하시고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1. 로스쿨 입학

저는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제 또래가 그러하듯,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취업을 준비했던 평범한 공학도였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운이 좋게도, 학부 졸업과 동시에 제가 원했던 기업에 바로 합격하여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해당 기업은 국내 유수의 방위산업체였는데, 업무 특성상 MIL SPEC(Military Specification, 미 국방규격)을 기준으로 하여 업무가 진행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자공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었던 저로서는, 규정과 매뉴얼에 따라 세부 업무가 진행되는 그 과정들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또한 전자공학 지식의 기반 위에 각종 법률 및 계약 체결 검토에 대한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앞으로 제가 좀 더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법학에 대한 흥미로 이어졌으며, 때마침 개원한 법학전문대학원에 도전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사모곡(思母曲)

퇴사 후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난생처음 접하는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저에게는 많이 버거웠습니다. 동기생들은 법대를 졸업하였거나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을 준비하며 법학에 대한 사전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실력이 탁월한 동기들을 보며 주눅이 들 때도 많았지만,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한다면 언젠가는 저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갖출 수 있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들이 헛되지 않아 나도 잘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생전에 본인 명의뿐만 아니라 남은 가족들 명의로도 막대한 빚을 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래시장에서 콩나물 100, 200원을 구입할 때도 일일이 가계부를 작성하실 만큼 검소하시고 경제 개념이 확실한 분이셨기에, 그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동시에 당장 갚아야 하는 대출금 이자 변제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학업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로스쿨을 자퇴한 후 취업시장의 문을 두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 조문 오신 분들로부터 받은 부조금으로 급한 대출금 이자부터 변제한 후, 입사 지원 원서를 닥치는 대로 작성하였습니다. (당시, 당장 그 다음날부터 학기말고사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는데 공부도 하지 않고 PC실에서 취업원서를 쓰고 있는 저를, 동기들과 후배들이 의아하게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요? 제 사정을 알게 된 교수님들께서 교내 가계 곤란 장학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 주셨었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어려움에 빠져 있던 제게 내밀어 주신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장학금은 졸업 학기까지 이어졌고, 덕분에 저는 자퇴나 휴학 없이 로스쿨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기 등록금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해도, 제 명의의 채무나 생활비 그리고 교재 구입비 등 변호사시험 준비에 필요한 비용은 어디까지나 제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로스쿨 재학 내내 경제적인 압박감이 따라왔습니다.

특히 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채무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우선 가구 및 가전기기에 대한 유체동산 압류가 진행되어 가압류 딱지가 붙었었습니다. 이후 주택에 대한 경매가 진행되어 낙찰 및 매각이 이루어지고, 인도 과정에서 경매 진행 과정을 대행한 업자들이 집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이러한 절차들은 제1회 변호사시험 시행 직전에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저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변호사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만으로도 힘겨웠는데, 저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중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도저히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제1회 변호사시험의 경우 합격률이 상당히 높았으나, 이러한 사정으로 저는 결국 불합격의 고배를 들었습니다.

3. 연이은 낙방

첫 번째 변호사시험에서 탈락한 후, 충격이 컸습니다. 특히 합격률이 높았던 해였기 때문에, 더욱 실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에겐 남모를 사정이 있었고, 비록 탈락하였으나 실전 응시의 경험도 있으니 잘 준비한다면 이 다음의 시험에서는 합격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힘을 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분들도 많이 응원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이 저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비해서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엔 경황이 없어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심하게 겪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성과는 더디게 나왔습니다.

또한 로스쿨 재학 시절부터 이어진 경제적인 문제 역시,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려운 환경, 극심한 압박감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 저는 두 번째 변호사시험에서도 불합격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험보다 성적이 많이 상승하기는 했으나, 이전 시험에 비해 높아진 합격 커트라인 점수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불합격의 충격 속에서 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변호사시험 준비하고, 그리고 합격 커트라인에 몇 점 부족한 성적으로 또 다시 불합격하고… 이러한 일들이 몇 번 되풀이되어, 결국 저는 5년간 5회에 한해 주어지는 변호사시험 응시 횟수를 모두 소진하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오탈자’가 된 것이죠.

4. 방황과 다짐의 시간

변호사시험에 최종 탈락한 이후, 저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나에게 이러한 시련이 닥쳤는가?’라는 원망의 마음도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냉혹한 세상에 직시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고 첫 번째 변호사시험에서 낙방했을 때도 곁에서 지지하던 오랜 지인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5회의 응시 제한 횟수를 모두 소진하게 되자, 그 중에서 태도를 달리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결코 그 분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맹상군 열전’에서 풍환이 이야기했듯이,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니까요. 다만, 어려운 제 처지를 이용하여 제 노동력을 싼값에 착취하려 한다든지,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제가 가장 가깝다 여기고 각별히 대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또한 과거 저희 부모님께 도움도 많이 받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가… 사실 지금까지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모든 걸 바쳐 노력했는데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이 빚만 잔뜩 쌓여 있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무력하게 자포자기의 시간을 보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 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문을 두드렸으나,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아마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렀을 때쯤, 무엇보다 제 마음을 다잡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계발, 심리학, 역사 등을 닥치는 대로 공부하며 제 마음을 굳게 다질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았습니다. 도서, 신문, TV, 인터넷 등 그 매체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야 어느 정도 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 글과 말들로부터 감명을 받았는데, 그 중 제게 큰 울림을 주었던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탓’과 ‘책임’을 구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교통법규를 준수하면서 횡단보도 앞에서 대기 중이라고 하자. 그런데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차량이 느닷없이 당신을 향해 돌진하여, 당신이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당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자포자기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제 경우,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 이후의 어려움들은 제 ‘탓’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에 좌절하고 분노하여 제 인생을 ‘책임’ 있게 살아가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탓’과 ‘책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어머니와 저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저는 ‘내가 만약 로스쿨에 진학하지 않고 그대로 직장생활을 했었더라면, 혹시 우리 가족의 상황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의학에서 얘기하는 ‘길트(guilt) 반응’의 일종이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그것이 악순환의 쳇바퀴를 돌게 된 원인이었는데, 위 조언을 듣고 비로소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제 삶을 ‘책임’ 있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악인 송소희 씨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하신 말씀도 제게는 크게 다가왔습니다. 슬럼프에 빠져 홀로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 한 분께 들으신 말씀이라고 하는데, “많이 힘들어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흐르는 대로 그 흐름을 타고 가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도 현실을 직시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제가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변호사시험에서 최종 탈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험에 탈락하였다 해서, 제가 지금껏 공부한 내용이 제 머릿속에서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 공부하였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제 훌륭한 자산인 것입니다. 학부 시절 공부했었던 전자공학의 지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저에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5. 세상에 다시 나아가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편,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2022년 올해 1월 초부터 다시 직장인으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현 직장에 혹 누가 될지 몰라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는 없으나, 저는 현재 한 대학교 소속의 행정연구원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2020년 7월 ‘한국판 뉴딜’ 정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기 회복을 위해 마련된 국가 프로젝트를 말합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분야는 그 중 ‘디지털 뉴딜’인데, 여러 대학에 흩어져 있는 신기술분야 교육자원의 공동 활용 및 국가 핵심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대학 사업단이 제 새로운 직장입니다.

이 사업단에서 저는 장비 구매 및 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장비 구매 계약을 사전에 검토하고 관련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금껏 공부했던 법학 지식들이 알게 모르게 크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공부했었던 공공계약 체결에 대한 실무를 직접 접하니 굉장히 흥미롭기도 하고, 또 새로운 시각에서 내용을 바라볼 수 있어 그 자체로서 많이 공부가 됩니다. 또 사업단 특성상 구입한 장비 중에는 서버 관련 물품이 많은데, 이 서버 시스템을 구축 및 운영, 관리하는 과정에서 학부 시절 공부했었던 전자공학 지식을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힘들게 배운 것은, 언젠가는 다 쓰이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6. 글을 마무리하며

현재 제20대 대통령선거 일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글 작성일 : 2022년 2월 23일). 그리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분들께서 ‘현 로스쿨 제도의 개선 및 사법시험 일부 부활 여부’ 문제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셨다는 소식을 언론 매체를 통하여 접하였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생이자 해당 쟁점의 이해당사자인 저도 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실, 오탈자 신분인 저에게 다시 변호사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법조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방도가 열릴지 아니면 지금처럼 변호사로서의 꿈은 영영 이룰 수 없는 것인지, 미약한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 로스쿨에 입학, 졸업하여 변호사시험에 응시하고 또 실패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어려운 시련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보다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제 인생이 어떻게 이어질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저는 한 개인으로서의 제 삶을 오롯이 살아낼 각오입니다. 제게 주어진 작지만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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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2022-05-23 15:59:20
참 슬픈 사연일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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