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63-지엽적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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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63-지엽적 감정
  • 손호영
  • 승인 2022.03.2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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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피천득 선생이 상하이에서 머물 때입니다. 어느 늙은 거지가 일 원짜리 은전 한 닢을 들고 여러 전장(錢莊)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돈이 못 쓰는 것이나 아닌지 보아 주십시오.”, “정말 은으로 만든 돈입니까?” 전장 주인은 물끄러미 거지를 바라보다가, 긍정하는 대답을 합니다. 기쁨이 온 얼굴을 뒤엎은 거지는 계속해서 자신이 가진 은전 한 닢의 가치를 확인받고자 합니다. 어떤 주인이 거지에게 호기심 반 의심 반 추궁합니다. “어디서 훔쳤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웠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누가 이렇게 큰 돈을 흘리고 다닙니까? 돌려주십시오.”

애지중지 은전 한 닢을 품고 다니다가는 별안간 만져 확인한 다음에는 배시시 웃는 그를, 피천득 선생은 도저히 궁금증을 억누를 수 없어 따라가 묻습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줬습니까?” 일단 방어적 태세를 보인 그는 곧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절실했던 노력을 말합니다. “훔친 것도 아니고 주운 것도 아닙니다. 한 푼 한 푼 얻은 돈을 모아 마흔 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고, 이러기를 여섯 번 하여 귀한 이 한 닢을 얻었습니다. 여섯 달이 걸렸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습니까?” 머뭇거리다가 그가 말합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처음 접했던 수필집이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었습니다. 책에는 시대를 겪어낸 선생의 따뜻한 경험담이 진솔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 책에 담긴 수필 중 <은전 한 닢>도 읽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당시 제가 느낀 감정은 ‘안쓰러움’이었습니다. 자신의 결핍을 스스로 눈가림하기 위해 ‘은전 한 닢’이라는 상징을 얻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 이해가 실은 그의 처지가 애처롭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함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그는 ‘고달픈 상황에 은전 한 닢이나마 가져보아 잠시나마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기에, 그를 안쓰럽게 여겼습니다.

<은전 한 닢>은 이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뭇 해설은 “소망을 이루려는 노력과 그 성취의 기쁨”. “맹목적인 소유욕과 집착에 대한 연민”을 <은전 한 닢>의 주제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고, 늙은 거지가 은전 한 닢을 얻고자 한 마음의 발원이 잘 설명되지 않는 듯 하지만 정상적이지만은 않은 그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 모자람은 없어 보였습니다.

100원짜리 동전이 100개 모이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있든 값어치는 같습니다. 돈은 수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00원짜리 동전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굳이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더욱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굳이 가지고자 하는 것은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 원의 값어치(수단)로 무엇(목표)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수단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을 ‘맹목적인 소유욕과 집착’으로 평가하는 것은 타당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조리와 비논리가 문학을 가능하게 합니다.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주목할 때, 우리는 감정을 느끼고 새로운 궁리를 합니다. 늙은 거지의 마음은 어떠했던 것인지, 그를 바라보는 피천득 선생은 어떤 기분이 들었던 것인지, <은전 한 닢>이라는 콩트(conte)적 수필로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던 것인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반면 법과 재판은 이러한 지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쳐두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컨대, “보석취소결정에 따른 재구금에 불응하고 도망을 한 피고인에게까지 보석보증금을 환부해야 하는 것이 건전한 법감정에 반한다고 하여 법의 근거 없이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처벌을 가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 형사법의 확대해석과 유추해석의 금지 등 법리에 비추어 용인할 수 없다.”는 대법원 2000모22 전합 결정의 반대의견의 기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법과 재판은 ‘별론(別論)’, ‘영향이 없다’는 등의 표현으로 법적으로 의미가 있지 않은 것들은 논의의 장에서 미뤄둡니다. 이를 통해 문제를 확정하고, 해결의 역량을 집중하며, 결론으로 직진합니다.

효율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방향이되 법과 재판이 미처 보지 못하는 당사자들의 여러 감정들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는 말아야 겠습니다. 당사자가 분노를 드러내고 섭섭함을 나타내거나 기쁨을 표시하고 호기심을 나타내는 그 감정의 배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은, 법과 재판이 지엽적인 것이라 일컫는 것들이 어쩌면 당사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늙은 거지의 행동은 경제적이든 법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문학의 틀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기었음은 분명합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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