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규칙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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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규칙의 양면성
  • 안혜성 기자
  • 승인 2022.03.11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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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저널=안혜성 기자] 철학을 소재로 다룬 책 중에 소피의 세계라는 작품이 있다. 소피 아문센이라는 소녀는 어느 날 “너는 누구니?”라는 글이 쓰여 있는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받게 되고 그 편지를 시작으로 알베르토 크녹스라는 선생님과 함께 철학사의 흐름을 따라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어린 학생들도 재밌게 철학의 기초를 공부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추리소설과 같은 구조로 진행되는 책의 후반부에 소피는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최근에 주변의 추천으로 접하게 된 한 웹소설과 영화도 소피의 세계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줬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제목의 웹소설은 세상의 멸망을 다룬 한 웹소설의 유일한 독자인 김독자가 마지막회를 읽던 날, 세상이 갑자기 그 인기 없는 웹소설의 세계로 바뀌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활자로만 읽던 세상이 현실이 되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현실 세계의 인물들과 섞여서 존재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미래를 아는 존재인 김독자가 겪는 모험과 수많은 선택이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세계에서는 마치 게임 속의 세상처럼 시나리오가 주어지고 김독자를 비롯한 사람들은 해당 시나리오가 제시하는 규칙에 따라 조건을 달성해야 한다.

영화 프리가이 역시 비슷한 요소를 갖고 있다. 주인공 가이는 은행원으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반려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하늘색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는다. 출근길에는 언제나 똑같은 커피를 마시고 똑같은 이웃들에게 똑같은 인사를 한다. 하루에 몇 번씩 은행강도들이 들이닥치지만 잠시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면 되는 일상일 뿐이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는 일들에 의구심을 가지는 일은 없다. 가이는 게임 속의 인물, NPC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그리던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가이는 그동안 하지 않던 일들을 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삶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피가 살아가는 세계에도, 도깨비와 성운들의 시나리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김독자의 세계에도, 가이의 게임 속 세계에도 정해진 규칙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은 그 규칙을 거부할 수 없다. 소피는 작가가 쓰는 대로 살아야 하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고, 김독자는 주어진 시나리오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죽거나 그 세계를 지배하는 개연성의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 게임 캐릭터인 가이 역시 프로그래밍 된 말과 행동만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 규칙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을 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운명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어차피 모든 일이 정해진 결말로 이어질 거라면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거대한 세계와 그 세계를 구성하는 규칙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렇게 인간의 식견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세계는, 이 사회는 인간을 구속하는 수많은 규칙을 갖고 있다. 그 규칙은 물론 사회를 유지하고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법일 것이다.

최근에 사랑샘재단의 ‘새로운 꿈을 찾는 마중물 프로젝트’ 지원자들의 에세이를 읽을 기회가 생겼다. 소위 오탈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겪어야 했던 충격과 좌절, 그리고 다시 일어서려는 노력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법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했다.

전문적 역량이 필요한 영역을 보호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역량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이나 자격을 얻은 후에도 의무를 위반하거나 범법행위를 했을 때는 자격을 정지하거나 박탈하는 규정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 제한이 과도하게 된다면 법은 더 이상 보호 장치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구속에 지나지 않게 된다.

5년간 5번 시험에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영구적으로 박탈하는 오탈제가 바로 그렇다. 직업은 단순히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때문에 그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매우 신중해야 한다.

비단 오탈자들만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의해 꿈을 빼앗긴 모든 이들이 소피나 김독자, 가이처럼 규칙의 구속을 끊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그 첫걸음으로 오탈제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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