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초라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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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초라한 꿈
  • 안혜성 기자
  • 승인 2021.12.31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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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저널=안혜성 기자] 벌써 한참 전에 방영된 드라마 중에 ‘선덕여왕’은 호흡이 긴 드라마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회까지 챙겨볼 정도로 재밌게 봤던 작품이었다. 타이틀 롤인 선덕여왕이 겪은 고난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팩션(Faction)이었는데 오히려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은 것은 실존 인물인지 조차 논란이 있는 ‘미실’이었다.

드라마에서의 미실은 수많은 왕비를 배출해 온 진골 가문 출신으로 진흥왕의 곁에서 정무를 보좌하는 것은 물론 국토를 수호하고 확장하기 위한 전쟁에서도 활약할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으나 오히려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진흥왕은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이가 없어지는 상황을 우려하며 자신의 사후 미실을 죽이라는 명을 남겼다.

야망을 품은 능력자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이들의 능력과 야망을 경계하고 제거하려는 상황이 종종 생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꼭 이런 배척이 야망을 더 키우고 행동으로 옮기게 만드는 계기가 되곤 한다. 신라의 인재로 머물던 미실도 죽음의 위기를 피하고 난 후 본격적으로 야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바로 왕비가 되는 것.

왕비가 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모략을 펼치고 자신이 낳은 아들마저 가차 없이 버렸다. 실상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미실은 만족할 수 없었다. 단 하나 이루지 못한 왕비라는 꿈 때문에. 그런데 행방이 묘연했던 덕만 공주가 돌아오고 천명 공주의 아들인 김춘추가 나타나서는 신라를 갖겠다고, 왕이 되겠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모두 왕이 될 수 없는 결함이 있었다. 덕만 공주는 여자였고,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 신분이었다.

평생 왕비가 되겠다는 꿈 하나를 향해 달려온 미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자신이 여자이고 진골이라는 이유로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왕이라는 꿈 앞에서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것들이 너무도 초라해졌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강하고 냉정한 모습을 유지했던 미실이 무너졌던 단 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한 드라마를 소개하는 글에서 미실의 초라한 꿈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해 우리는’이라는 드라마는 요약하자면 헤어졌던 커플이 재회하면서 생기는 이야기로 멜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보지 않았는데 그 소개글을 보고는 관심이 생겼다.

소개글에 따르면 국연수는 어린 시절에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고등학생이다. 너무 가난해서 친구와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바나나 우유 하나 사는 것도 힘들어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포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최웅이라는 아이가 다가왔다. 최웅의 다정함으로 힘겨운 현실을 잠시 나마 잊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성장 배경의 차이, 그로 인한 성격이나 가치관의 차이는 국연수의 마음에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을 받기 위한 공부에 바쁜 국연수에게 최웅은 꿈이 뭐냐고 묻는다. 국연수는 취업을 해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할머니가 일을 하지 않으시도록 하는 것이라 답한다. 최웅은 “그게 다야?”라고 되물었다. “좀 더 큰 성공에 대한 꿈이 있을 줄 알았지”라는 그의 말은 국연수에게 “어쩌면 이건 내가 원한 꿈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선택지 없는 시험지였을까”라는 의문을 남긴다.

미실은 성별과 신분으로 인해, 국연수는 가난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조그만 상자 속에 구겨 넣었다. 이는 비단 드라마 속 인물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묻는 설문조사 결과 등을 보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다사다난 했던 한 해가 끝나가는 시기, 희망이 필요한 때다. 모쪼록 새해에는 나이, 현재의 직업이나 경력, 학벌, 가난 등의 장벽에 가로막혀 꿈을 꾸지도 못하는 이들이 없어지기를 빌어본다. 미실은 한때 초라한 꿈에 묶여 있었으나 결국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갔다. 우리도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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