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49-그림자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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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49-그림자 아이
  • 손호영
  • 승인 2021.12.1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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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세상에 태어나도 존재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서류상 존재하지 않은 미(未)등록 아이들이다. 이들은 ‘무명남’ ‘무명녀’로 짧은 생을 살다가 끔찍한 범죄가 벌어지고 나서야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통계에 잡히지 않은 미등록 아동은 최소 8000명에서 최대 2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그림자 아이’가 발생하는 데는 부모 신고에 의존하는 현행 출생신고 제도가 가장 큰 원인로 꼽힌다(<아이 이름은 무명녀...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이들> 2021. 2. 1.자 아시아투데이 기사).”

교제했던 여인이 갑자기 생후 8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남자를 찾아옵니다. 잠시 맡긴다고 하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홀로 아이를 맡게 된 남자는 일하던 보험설계사를 관두고,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일할 수 있는 지하철 택배 일을 시작합니다. 아이는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미혼모는 출생신고가 가능하지만, 미혼부는 생모의 개인정보 등을 알 수 없으면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던 당시 법 때문입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를 고아원에 맡긴 뒤 고아원에서 출생신고를 하면 나중에 법원의 판결로 아버지임을 확인받으면 됩니다. 쉬운 길일 수 있으나 떳떳하지는 않습니다. 남자는 편법을 택하기보다 정도(正道)를 걷고자 합니다. 아버지 있는 아이에게 잠시나마 ‘고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미안했을 것입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는 아이는 제도의 사각에 놓이게 됩니다. 당연하다 싶은 건강보험 혜택도 받기 어렵습니다. 아이에게 일이 생겼을 때, 지방자치단체나 수사기관이 움직이고자 해도 쉽지 않습니다. 남자는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가 홀로 버틸 수 없을 만큼 커지자, 세상에 도움을 청합니다.

언론을 통해서 남자의 사연이 화제가 되었고, 미처 보듬어주지 못한 아이를 위해 제도가 정비됩니다. 사안의 심각성, 긴급성, 중요성 등을 고려하여, 국회는 아이의 이름을 따 2015. 5. 18. 일명 ‘사랑이법’을 입법합니다.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57조 제2항부터 제5항까지 신설됩니다. 제2항을 우선 확인해봅니다. “모의 성명·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부의 등록기준지 또는 주소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아 제1항에 따른 신고를 할 수 있다.”

대법원은 진일보한 사랑이법의 취지를 십분 고려하고자 하였고, 위 법의 적용범위를 넓혀 해석합니다. 사랑이와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은 처지에 있었던 아이에게, ‘아동의 출생등록될 권리’를 인정한 것입니다.

즉, 위 법에 따르면 아이의 어머니가 외국인이어도 출생증명서에 어머니의 성명, 출생연월일, 국적이 기재되어있고 그 내용이 출생증명서의 ‘출생아의 모’란의 기재내용과 일치하는 경우, “모의 성명·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게 됩니다. 이에 따라 아버지가 혼인 외 출생자인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때에는 여러 서류가 필요하게 되는데, 해당 사건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여권의 효력을 정지당하는 바람에 이 사건 예규 제8조에서 정한 출생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지 못하였고,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대법원(대법원 2020스575 결정)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아동에 대하여 국가가 출생신고를 받아주지 않거나 그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 출생신고를 받아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는 그 아동으로부터 사회적 신분을 취득할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및 아동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를 이용하려면 주민등록과 같은 사회적 신분을 갖추어야 하고, 사회적 신분의 취득은 개인에 대한 출생신고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등록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법 앞에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로서 모든 기본권 보장의 전제가 되는 기본권이므로 법률로써도 이를 제한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그리고 위 법의 취지를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문언에 기재된 ‘모의 성명·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는 예시적인 것이므로, 이 사건과 같이 외국인인 모의 인적사항은 알지만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출생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출 수 없는 경우 또는 모의 소재불명이나 모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생신고에 필요한 서류 발급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 등과 같이 그에 준하는 사정이 있는 때에도 적용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대법원의 판단은 국회를 다시 움직이게 합니다. 2021. 3. 16. 제1항에 단서가 추가됩니다. “다만, 모가 특정됨에도 불구하고 부가 본문에 따른 신고를 함에 있어 모의 소재불명 또는 모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생신고에 필요한 서류 제출에 협조하지 아니하는 등의 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부의 등록기준지 또는 주소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아 신고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2항도 개정됩니다. “모의 성명·등록기준지 및 주민등록번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알 수 없어 모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 또는 모가 공적 서류·증명서·장부 등에 의하여 특정될 수 없는 경우에는 부의 등록기준지 또는 주소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아 제1항에 따른 신고를 할 수 있다.”

어느 신문기사에서는 그림자 아이가 투명인간과 다름없다고 합니다. 불안한 상황에 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용기 있는 아버지가 나섰고, 공감한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었으며, 드디어 입법부와 사법부가 대응했습니다. 사회는 이렇게 변화되어 갑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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