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44-머리를 맞대면
상태바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44-머리를 맞대면
  • 손호영
  • 승인 2021.11.05 1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1968년 미군의 잠수함이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지자, 군은 당황합니다. 수색을 어디서부터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는데, 과학자 존 크레이븐(John P. Craven)이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를 꺼내듭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에게 잠수함의 침몰 위치를 물어보고, 각 시나리오와 결과치를 종합·분석해 결과를 도출한 것입니다. 개별 전문가들의 예측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이들의 평균 예상치는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놀랍게도 해당 결과는 실제 침몰 위치에 상당히 근접했으니, 성공적이었다 하겠습니다.

여럿이 머리를 맞대는 이유는 이처럼 한 사람의 해답이 반드시 정답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하고, 조언을 구하며, 나름의 궁리를 거치는 과정은 지혜롭고 타당한 결론을 얻기 위해 필요합니다.

17세기 즈음 커피가 아랍에서 유럽에 전파되었을 때, 사람들은 커피하우스(Coffee House)에 모여들었습니다. 커피하우스는 영국에서 특히 발달했는데, 모든 계층에게 개방된 일종의 클럽이었다고 합니다. 법률가, 예술가, 금융인, 상인 등이 한 군데 모여들어 정보를 나누고 의견을 개진하며 논의했습니다. 융합 컨텐츠의 산실이었고, 동시에 사랑방이었습니다. 커피하우스는 덕분에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 즉 커피 한 잔 값 대학이라 불렸습니다. 그만큼 접근이 용이하면서, 공유되는 지식과 정보가 상당했고, 유용했다는 뜻입니다.

현대의 커피하우스는 인터넷 공간으로 옮겨진 듯합니다. 여럿이 모여 지식을 쌓아가는 개념으로 유명한 위키피디아는 네트워크 사회의 집단지성 대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자유롭게 해당 주제에 대하여 글을 적고, 수정되는 과정이 집적되면 어느새 출중한 내용이 만들어집니다.

위키피디아의 작업 방식이 새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고전적인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만들 때에도 참여형 방식이 포함되었습니다. 편찬자 제임스 머리(James Murray)는 지식인들이 보는 잡지에 엽서를 끼워 보냅니다. 책을 읽다 혹시 표현이 특이하거나 오래된 것 같아 조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편집부는 특히 윌리엄 마이너(William Chester Minor)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윌리엄 마이너는 여러 책을 읽고 예문을 정리해두었다가 편집부의 요청에 걸맞게 보내주었고, 편집부와 10년 넘게 교류합니다.

그의 기여도는 상당했기에 제임스 머리가 윌리엄 마이너를 찾아 만나는데, 그가 사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놀라면서도 제임스 머리는 그에게 헌사를 바칩니다. “그가 보내준 인용문만으로 지난 400년 동안을 쉽게 묘사할 수 있었다(we could easily illustrate the last four centuries from his quotations alone).”

만약 제임스 머리가 윌리엄 마이너의 정신질환을 미리 알았다면, 과연 그를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에 참여하게 했을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더군다나 윌리엄 마이너는 그의 정신질환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까지 한 전과가 있었습니다. 직접 보지 않고, 편견 없이 그가 보내준 예문을 보았기에,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한 단계 더 나아졌던 것이 아닐까요.

법학도 여럿이 머리를 맞대면 더 이해하기 수월하고 적용하는 데 나아지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법문을 해석하는 것, 판례를 이해하는 것, 법리를 사안에 적용하는 것, 각 단계별로 혼자서 해나가기보다는 주위의 동료들에게 물어보며 타당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들은 법조인들에게는 익숙한 일입니다.

합의부로 구성된 재판부는 3인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서로 논의하며, 생각이 다르면 다시 기록을 보고 재차 논의를 합니다. 합의부 부장님들께서 늘 하시는 말씀, “다른 판사들에게도 물어보고 다시 논의해보자.”는 뜻은 여러 각도와 시선에서 사안을 깊이 있게 이해하자는 의미임을 알고 있습니다. 단독 재판장이 되었을 때에는, 같은 사무분담에 있는 단독 재판장들 사이에서 질문하고 답하고 연구하는 일이 일상이었던 것도, 사안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실무가 아닌 수험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혼자서 해나가는 것이 자유롭기는 하지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들과 서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터디를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함께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머리를 맞대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혹시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한 누군가의 편견에 오도될 수도 있고, 자칫 잘못된 지식과 정보가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본인이 중심을 잘 잡고, 모인 내용을 종합·분석하고 검증하며 확인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