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42-역설적 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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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42-역설적 무법
  • 손호영
  • 승인 2021.10.2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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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기상캐스터 필은 자기애가 충만합니다. 메인스트림에 편입되어도 모자랄 자신이 겨우 기상캐스터에 머무르는 것도 불만이고, 이 추운 겨울날 매멋(groundhog)이 겨울잠에서 깨어 나와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지 확인하는 성촉절 행사(매멋이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더 간다고 합니다) 촬영 때문에 펜실베니아 시골로 온 것도 탐탁지 않습니다. 온통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인 촬영 일정에서 필은 오직 PD 리타에게만은 호감을 보입니다. 리타의 진실성과 그로 인한 매력이 필에게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리타는 필의 격정 어린 토로나 그가 종종 드러내는 호감을 대충 흘려듣고 적당히 무시하는 형편입니다.

행사와 촬영이 마무리되고 이제야 되돌아가나 싶더니, 눈이 지극히 쌓여 복귀가 어려워졌습니다. 시골에서 하루 더 머물러야 되자 필은 빨리 내일이 오길 바랍니다.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뜬 그에게 닥친 현실은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내일인 줄 알았던 오늘이 어제입니다. 피하고 싶던 성촉절이 이제 말 그대로 매일 다가옵니다.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히 하루가 거듭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필이 변화되는 모습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시간이 되돌려지는 상황은 과연 축복일지 굴레일지, 필의 여정은 어떻게 마무리될지 흥미진진합니다.

24:00가 되면 필은 어김없이 정신을 잃고 같은 날 06:00에 눈을 뜹니다. 필은 처음에는 의심하고 부정합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필이 상황을 수용한 때는, 언제나 같은 뉴스로 시작되는 하루, 자신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어제와 동일한 첫 대사를 알아채고 나서입니다.

필은 환호합니다.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취득할 수 있으니, 우월한 지위에 놓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접근하여 출신학교, 좋아하는 것 등을 차근차근 알아낸 뒤, 접근하여 연인이 되기도 하고, 은행에서 관리하는 돈자루를 감시가 소홀해지는 틈을 계산해 느긋하게 가져가기도 합니다. 필이 그토록 원했던 인기와 돈은 손쉽게 얻어집니다.

진정 다가가고 싶었던 리타에게 접근한 결과는 달랐습니다. 정성과 집념으로 리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했지만, 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질 문턱에서 멈춥니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어느새 하루가 지나면 다시 처음부터입니다. 필은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진절머리가 나고 포기하기까지 하지만 끈질긴 운명은 필을 놔주지 않습니다.

필은 리타에게 자신의 상황을 모두 고백하기까지 합니다. 믿지 못하는 리타에게 필은 자신이 아는 동네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밝히며 그의 처지를 증명합니다. 리타는 호기심에 24:00까지 필과 함께 있어 보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공감하며 소소한 카드게임도 하며 가까워집니다. 이번에야말로 리타 때문에라도, 내일이 올까 조심스럽게 기대한 필이 마주한 것은 여전히 오늘입니다.

이제 필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떻게 이 하루를 보낼지 고심한 뒤 행동을 시작합니다. 성촉절 필은 그 날 생을 마감할 운명인 노인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하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잡아주며, 고장난 타이어를 교체해주는 선의를 베풉니다. 문학을 감상하고, 피아노를 배웁니다. 단 하루 동안 필은 오래된 인사처럼 마을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리타는 어제의 필이 오늘의 필과 다름에 무척 놀라고 그를 알고 싶습니다. 필의 하루를 살 수 있는 경매에서 지갑의 돈을 모두 털어 진지하게 대화합니다. 필은 사랑스러운 리타와 밤을 지새우는데, 온전히 포기하다시피 한 내일이 드디어 찾아옵니다. 둘은 연인이 되고, 영화는 엔딩을 맞습니다.

영화는 단계별로 필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초자연적 현상을 맞았을 때 사람이 행하는 일반적인 모습부터 종국적으로 취하게 되는 행동까지 다룹니다. 영화 초반 필은 은행의 돈자루를 들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무엇을 해도 처벌받지 않을 시간의 소급효는 그를 모든 규제에서 자유롭게 했습니다.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과 도덕은 이토록 무거웠나 싶을 정도로, 법과 도덕에서 자유롭게 된 필은 그만큼 가벼워진 듯해 보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의 필입니다. 좌절을 거쳐 무언가 깨달은 필은 자발적으로 타인을 돕습니다.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잊을 그들에게 선의를 지속적으로 베풉니다. 이때의 필에게는 법과 도덕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이미 그의 행동 자체가 법과 도덕에 자연스럽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무법(無法)과 이후의 무법(無法)이 천양지차로 다릅니다. 전자는 법을 무시하는 무법이라면 후자는 법이 없어도 되는 무법입니다. 영화는 사람이 자칫 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으나 이는 일시적이고 표피적인 것일 뿐이며, 결국 법이 없어도 되는 상태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역설적 무법이 바로 사람이 최종적으로 바라고 안정되는 상태라는 영화의 통찰은 자못 감동적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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