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강정구 영어 연구소 대표
공단기 영어 대표 강사
★ footnote
footnote는 "각주(脚註)"다. 논문이나 학술적인 글에서 인용하거나 참고한 자료를 밝히거나, 어느 부분을 좀 더 설명하고자 할 때 본문 아래쪽에 따로 쓰는 글을 말한다. 이런 글을 본문 아래 대신 책의 끝부분에 쓰는 것은 endnote(미주)라고 한다. 서양에서 1697년에 첫선을 보인 각주는 오늘날 학술성의 최대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 각주는 자주 과시용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속물적이다.

독일의 영문학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에서 자연과학을 특징 짓는 표시가 실험이라면, 텍스트학에는 '각주'가 있다며 '각주'에 각주를 달아 3쪽에 걸쳐 긴 해설을 늘어놓았다. "각주가 있어야만 텍스트는 비로소 학술적이 된다. 역사적 학문들이 충분히 학술적이지 못하다는 데카르트주의자의 비판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각주는 성립했다. 그로써 텍스트학의 검증 도구로서의 각주는 자연과학 분야의 실험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슈바니츠는 그러나 각주를 이해하기 위한 본래의 코드는 명예욕이라고 말한다. 각주는 모든 방면에 활용할 수 있는 다목적 무기라는 것이다. "학자는 본문에서 착용했던 예의범절이라는 가면을 각주 부분에서는 잠시 벗고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도 괜찮다. 이런 점에서 각주는 본문보다 더 진실하며, 이 진실을 경쟁자에게 보여주어도 되는 곳이다." 슈바니츠는 많은 전술이 각주에 존재하는 것에 주목했다. 경쟁자의 텍스트를 전혀 인용하지 않는 것, 즉 무시(無視)라는 무기는 다른 학자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각주는 필요하다. 특히 역사 연구에선 더욱 그렇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각주를 위한 변명'을 시도했다. 그는 "본문 아래에서 혼자 동떨어져 놀고 있는 각주를 하나라도 보게 되면 현기증을 느낀다고 불평하는 독자들, 또는 실제로는 그다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한 고객들이 이처럼 엉망이 되어버린 지면을 보고 몹시 고통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출판업자들, 위와 같은 까다로운 사람들은 지성이 갖는 초보적인 도덕적 원칙에 관한 자신들의 몰이해를 증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공상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외하고 하나의 단정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입증될 수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가가 하나의 기록을 사용한 뒤 그 기록의 출처를 되도록 간결하게 밝혀주는 것, 바꿔 말해 그 기록을 재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은 단지 성실성이라는 보편적인 법칙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