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33-기억의 불완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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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33-기억의 불완전성
  • 손호영
  • 승인 2021.08.1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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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자신이 살해한 여인의 아이를, 왠지 모르게 딸로 삼아 책임감 있게 맡아 키웁니다. 어느덧 70대가 되어버린 살인범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을 것 같아 불안한 와중에, 자신과 동류인 사내가 딸을 노리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딸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내를 경계하면서 오랫동안 내버려 둔 근력을 회복한 뒤, 이제 사내 사냥을 시작하려 하는데...딸이 사라집니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는, 주인공으로 살인범을 내세웁니다. 소설은 내내 그의 관점에 따라 사건을 진행하는데, 그가 내뱉는 파편 같은 독백에 날이 서 있습니다. 독자는, 노인이 딸을 구해낼 수 있을지, 노인과 딸의 관계는 어떠한지, 사내의 정체는 무엇인지 오마조마 해하며 그의 시야에 집중하게 됩니다. 결말에서 맞닥뜨리는 기막힌 반전은, 돌이켜보면 노인이 스스로에 대하여 나직이 한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사막이다.“ 사막처럼 황폐한 기억 속에서 노인은 어떤 착각과 오인을 했던 것일까요. ‘나’라는 1인칭 화자의 감각과 경험, 기억은 왜곡될 수 있기에 그가 소개하는 세상이 반드시 진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살인자의 기억법>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쥐고 있습니다. 영상을 재생하기 전,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몇 번 주고받는가요?”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빙글빙글 돌면서, 위로 아래로 옆으로 요란스럽게 공을 주고받습니다. 어렵게 공을 따라가면서 횟수를 헤아리고 나서는, 영상이 끝나자 그 헤아림을 보상받으려는 듯 여기저기서 답을 외칩니다. 대체로 정답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다시 질문을 합니다. “혹시 고릴라 보셨어요?”

보이지 않는 고릴라(the invisible gorilla) 실험은 참가자들에게 영상이 재생되기 전 지시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이에 따라 참가자들 중 절반은 흰 옷을 입은 사람들과 농구공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눈으로 바삐 좇느라, 흰 옷 입은 사람들과 검은 옷 입은 사람들 사이에 고릴라 탈을 쓴 사람이 난입했음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고릴라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뒤, 다시 영상을 재생하면 참가자들은 놀랍니다. 도대체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제는 보입니다.” 진화된 버전은 여기서 한 번 더 상황을 마련합니다. “그러면 혹시 뒤에 배경색이 바뀐 건 보셨어요?”

중고등학생들이 법원을 견학을 올 때, 종종 ‘법관과의 대화’라는 시간이 준비됩니다. 제가 참여하게 될 때는, 위 영상을 보여주면서 소감을 묻기도 하는데, 이때 저는 고릴라 실험의 효과를 강화하고자, 비슷한 이벤트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처음 만날 때는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인사를 하고 진행을 하다가, 이후 영상을 보여줄 때 몰래 넥타이를 바꿔 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혹시 제가 맸던 넥타이 색깔 기억나시나요?” 고릴라 실험과 넥타이 실험을 함께 진행한 뒤에, 한마디 덧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과 기억이란 이토록 불완전합니다. 혹시 어느 사건에서 물증은 없고 목격자만 있는데, 목격자가 범인의 넥타이 색깔이 OO색이었다고 한다면, 이를 곧바로 믿을 수 있을까요?”

어느 심리학자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7가지로 구분해보았습니다(The Seven Sins of Memory). ①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력이 둔화되는 ‘소멸(transience)’, ② 제 때에 주의를 제대로 기울이지 않아서 발생하는 ‘정신없음(Absent-Mindedness)’, ③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만 어려운 ‘막힘(Blocking)’, ④ 잘못된 기억으로 인하여, 어떤 사건의 원인을 사실과 다르게 지목하게 되는 ‘오귀인(Misattribution)’, ⑤ 주어진 정보가 기존 기억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피암시성(Suggestibility)’, ⑥ 기존 지식과 믿음 또는 상태가 기억에 왜곡된 영향을 미치는 ‘편향(bias)’, ⑦ 잊고자 하는데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지속성(Persistence)’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처럼 기억이란 불완전하므로, 기억을 평가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대법원도 이와 같은 기억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금품수수 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에서 “금품공여자나 피고인의 진술 모두 각기 일부는 진실을, 일부는 허위나 과장·왜곡·착오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사실심 법관으로서는 금품공여자와 피고인 사이의 상반되고 모순되는 진술들 가운데 허위·과장·왜곡·착오를 배제한 진실을 찾아내고 그 진실들을 조합하여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대법원 2011. 5. 13. 선고 2010도16628 판결).”고 판시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사실을 주십시오. 그러면 법을 드리겠습니다(Da mihi factum, dabo tibi ius).”라는 법언은 법원의 역할을 주어진 사실에 법을 적용함에 그치는 것으로 오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흩어진 증거들을 토대로 진실을 재구성할 임무도 있습니다. 불완전한 기억을 가진 사람의 증언을 대할 때 신중하게 되는 것은, 결국 진실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법적용을 하기 위함인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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