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국제정치의 틈새 : 지정학적 급소(choke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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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국제정치의 틈새 : 지정학적 급소(choke point)
  • 신희섭
  • 승인 2021.08.0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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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원장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일상이 정치』 저자
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원장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일상이 정치』 저자

지리정치에도 급소(choke point)는 있다. 마치 격투기선수들이 상대에게 더는 싸울 수 없다는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공략하는 급소 같은 지역들. 우리는 실제 지정학적 급소가 있다는 것을 2021년 3월 23일 수에즈운하의 에버 기븐(Ever Given) 호 사건을 통해 보았다. 선체가 수에즈운하를 106일 동안 가로막았던 사건은 세계화 시대 취약성의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하루에 수에즈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선박 수는 106척 정도 된다고 한다. 2008년 한 해 동안 21,000여 대가 통과했고, 통과료로 53억 8천만 달러를 지불하였다. 2009년에는 22,000여 대가 통과했고, 통과료를 54억 달러나 지급했다. 한 척당 평균 통과비용이 25만 달러 정도 된다고 하니 꽤 비싼 편이다. 다만 최근에는 유가 하락에다 높아진 운하 통행료와 기타 잡비와 느린 운항 속도(시속 8노트로 15km) 탓에 9,000km를 더 가더라도 희망봉을 돌아서 가는 배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유럽이 지금보다 영향력 있을 때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인도양으로 연결하는 이 운하의 물동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 하지만 아시아가 유럽보다 더 성장하면서 비율은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수에즈운하는 전 세계 물동량의 8%에서 10%를 차지하고 있다.

지정학적 급소는 수에즈운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해주는 파나마 운하 역시 지정학적인 급소다. 이 운하가 생기기 전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란 두 개의 바다를 보호하는 데 애를 먹었고, 두 바다를 오가는데 1달이나 시간을 더 써야 했다. 한·중·일의 물동량 대부분이 통과하는 믈라카 해협도 중요한 급소 지역이다.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해주는 기준이면서 흑해를 지중해와 연결하거나 격리할 수 있는 지역이다. 러시아의 부동항을 찾기 위한 노력과 지중해 진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지역이다.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와서 대서양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야 한다. 이 지역 역시 해양시대 요새로서 요충지였다.

지중해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면 홍해가 나온다. 홍해를 거쳐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끝 지점에 바브엘만데브 해협이 있다. 예멘과 지부티 사이에 있는 이 해협은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해준다. 이 해협을 거쳐 나오면 청해부대로 유명한 아덴만을 만나게 된다. 이 해협이 마주하고 있는 아라비아반도의 동북쪽에는 악명높은 호르무즈 해협이 있다. 이란과 오만 사이에 있는 이 해협은 페르시아만에서 나는 원유를 수송하는 요충지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최남단에 희망봉도 수에즈운하가 열리기 전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지였다.

육지와 바다로 연결된 세계 정치에서 국가가 바다로 접근하고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이 사안이 강대국 정치만큼 중요하거나 같은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대국 간 정치만큼이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급소지점에서 나는 해상 사고나 쿠데타와 같은 국내정치 불안은 바로 소비재 가격으로 연동되기 때문이다. 믈라카 해협이 100일 이상 봉쇄되어 모든 물자 이동이 제한을 받는다고 하면 당장 한국은 원유 수급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급소를 가진 지역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체로 발전이 되지 않거나 힘이 약한 국가들인 경우가 많다.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스페인이 예외적일 정도로, 해협이나 운하를 끼고 있는 국가들은 경제발전이나 국력 수준이 높지 않다. 원양항해가 발전하고 난 뒤에 운하나 해협이 중요하게 되었고, 그 이전 시대에는 이 국가들이 발전하기 척박한 지리환경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범선이 증기선으로 대체되고, 증기선을 쓸 만큼의 물자를 생산하는 산업화에 뛰어들던 시기에도 이들 지역의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성장이 더뎠다.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거나, 지리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나 터키가 대표적이다.

운하와 해협이 과거보다 더 많은 물건을 실어나르는 시대가 되어 이 국가들의 생활환경이 좀 더 나아졌는가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세계화는 과거보다 더 많은 국가를 더 빠르게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도 중심 운송 수단은 선박이다. 세계화가 마치 인터넷을 통해 ‘초’ 단위 시대와 항공기를 통해 ‘시간’ 단위 시대를 연 듯하지만, 오프라인의 많은 물건은 여전히 바다를 이용하고 철도를 이용해서 수송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급소가 되는 지역을 가진 국가들의 사는 조건은 과거와 큰 변화는 없다. 이집트가 수에즈운하에 제2 수에즈운하를 개통했지만, 배가 좀 더 많이 지나가는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미래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내정이 불안정해질 수 있는 여지가 높고, 국제적 개입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고, 이해당사자들이 많아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간단히 말해 여전히 높은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급소 지역의 미래를 알아보려면 이들 지역에 대한 역사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할 주제가 하나 더 생겼다.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원장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일상이 정치』 저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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