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32-의사소통의 수고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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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32-의사소통의 수고로움
  • 손호영
  • 승인 2021.08.0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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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한나라 때, 열네 살의 조아(曹娥)는 아버지가 강물에 빠지자, 17일 동안 오르내리며 강물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결국 찾아내었다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를 효녀라 칭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칭송하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훗날 문인 채옹이 비문을 읽고는, 비석 뒤에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는 8글자를 새깁니다.

누런 비단(黃絹)과 어린 부인(幼婦), 외손자(外孫)와 부추 절구(虀臼)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도통 알기 어려워,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채옹이 쓴 글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시간이 흘러 조조가 근방을 지나다 채옹의 글을 봅니다. 어리둥절하기는 조조도 마찬가지, 조조는 곁에 있던 양수에게 묻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아는가? 양수는 어렵지 않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로 양수에게 답을 물어도 될 법하나, 우연히 만난 채옹의 질문이 괜히 호승심을 자극합니다. 잠시 기다려보게, 나도 생각해보겠네.

한참 곰곰 생각하던 조조가 드디어 깨달았다며 무릎을 치고는 양수에게 말합니다. 누런 비단은 색깔(色) 있는 실(絲)이니, 絶(절)이 되지. 어린 부인은 작은(少) 여인(女)이니, 妙(묘)가 되고, 외손자는 딸(女)의 아이(子)이니, 好(호)가 되며, 부추 절구는 매운 것(辛)을 절구(臼)로 찧는 것인데, 이는 매운 것을 받는다(受)고 할 것이니 辭(사)가 되네. 이들을 합치면, 절묘호사(絶妙好辭)가 되니, 결국 채옹은 비문에 대해서 “절묘하게 좋은 글”이라며 이를 높인 것이 되네. 맞는가? 양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합니다.

옛 고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글자를 이리저리 나누고 엮는 방식으로 은어(隱語)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채옹의 사례처럼 대단한 문장을 적어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고, 일상에서도 종종 쓰였습니다.

남자가 여인에게 용기 내어 쪽지를 적어보냅니다. “左絲右絲中言下心” 쪽지를 받은 여인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이내 답장을 합니다. “一三口牛頭不出” 서로의 마음이 충만해졌다는 후문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좋은 뜻임은 알겠는데, 궁금하니 그 의미를 한번 확인해봅니다. 우선, 남자의 쪽지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글자를 만들어나가 봅니다. 왼쪽(左)에 絲, 오른쪽(右)에 絲, 가운데(中)에 言, 아래(下)에 心을 순차로 그려보니, 그리워하다를 의미하는 戀(련)이 되었습니다. “그립습니다” 아마도 본뜻은 “사모합니다” 정도이겠지요? 여인이 쓴 답장은 어땠을까요? 一三口을 이어쓰면 言이 됩니다. 그리고 황소를 의미하는 牛에서, 머리가 나오지 않는다 하니(頭不出), 牛의 윗 꼭다리를 떼주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午가 되는데, 이를 言과 합쳐보면, 許(허락할 허)가 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쯤 되려나요? 달달하기 그지없습니다.

작곡가들도 곡에 자신의 지문을 남겨놓는 솜씨가 제법이었습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에게는 네 개의 음(레-미 플랫-도-시)으로 구성된 곡들이 있다고 합니다. 레-미 플랫-도-시는 독일식 음이름 체계로는 D-S(Es)-C-H입니다. 그런데 별 의미 없을 듯한 이 패턴은 사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드미트리의 첫 번째 알파벳은 D이고, 쇼스타코비치를 독일식으로 표기했을 때 첫 세 알파벳이 S, C, H이므로,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곡에 남긴 셈입니다.

뜻을 숨기되, 알아챌 수 있도록 숨긴다는 기묘한 틈에서, 찾음이 기를 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를 숨기는 한편, 해독을 열렬히 바라는 암호는 그 역설 덕분에 매력적입니다. 따라서 숨김과 찾음의 함수관계는 상호작용이고, 풀이의 열쇠를 찾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

전문분야의 문법(文法)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판례는 당연하게도 일의적이고 명백하여 그 뜻을 오롯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하나, 법학의 기본소양이 있으면 보다 잘 알아챌 수 있는 내용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법학이라는 지식과 소양이 판례 해석의 열쇠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계약인수가 이루어지면 계약관계에서 이미 발생한 채권·채무도 이를 인수 대상에서 배제하기로 하는 특약이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수인에게 이전된다(대법원 2020다245958 판결).”는 판례의 문장을 만났을 때, 법조인은 단지 계약인수의 실체법적 효력(기발생 채권·채무의 이전효과) 뿐만 아니라, 증명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와 같은 소송법적 의미까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채권자(원고)는 인수인(피고)을 상대로 계약인수를 주장하기만 하면 채무 이행을 구할 수 있는 것이고(청구원인), 이때, 인수인은 ‘기발생 채권·채무를 인수 대상에서 배제하기로 하는 특약이 있었다.’는 특별한 사정을 주장하고 이를 증명해내야 위 주장에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항변).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든, 숨어 있는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든 노력이 필요합니다. 표현하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가 서로에게 정성을 기울여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때, 우리는 의사소통이 잘 된다고 합니다. 결국, 의사소통은 표현하고 이해하려는 행위를 넘어, 노력과 정성이라는 수고로움이 드는 것이고, 그만큼 어렵되, 그만큼 가치로운 일일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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