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30-법학과 의학의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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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30-법학과 의학의 교차
  • 손호영
  • 승인 2021.07.23 10: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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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한 남자가 술을 잔뜩 마신 채 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옵니다. 비틀거리다가 휘청하더니, 손으로 화단 흙을 짚고는 다시 일어납니다. 아파트 경비원의 인사를 지나치고 무심히 집 안으로 들어와 옷도 벗지 않은 상태로 침대에 눕습니다. 아침이 되어 머리가 지끈거려 깨어나 부인과 아이를 부르려 할 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피 묻은 칼이 오른손 옆에 가만히 뉘어있는 것입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가보니, 부인과 아이는 이미 사망한 상태입니다. 남자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합니다.

경찰이 출동해 현장을 확인합니다. 아이의 상흔은 보통의 것이었지만, 특이한 것은 부인의 상처입니다. 가슴팍에 일렬로 6개의 상처가 가지런히 나 있습니다. 이 중에 치명상은 한두 군데일 듯합니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묻습니다. 저 남자가 들어간 이후로 누군가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부자 소행이라고 할 것인데, 신고를 하기는 했으나 용의 선상에 있는 남자에게 확인해봅니다. 혈액형이 어떻게 되시죠? 저는 A형입니다. 일단 알겠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혈액형을 채취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데 손에 흙은 왜 묻은 겁니까? 화단에서 한번 넘어졌습니다.

부인과 아이의 혈액형을 확인하니, 부인은 O형, 아이는 B형입니다. A형, O형 부모에 B형 아이라...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 같습니다. 탐문 수사를 해보기로 합니다. 아이의 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나 봅니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망설이던 선생님은 어렵사리 말을 꺼냅니다. 왠지 모르게 부인이 아이를 꺼리는 느낌을 받았달까요.

남자와 부인의 직업도 알아봅니다. 남자는 별다른 직장이 없었고, 부인은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약국 맞은편 카페에 가서, 남자의 사진을 보이며, 이 사람 아느냐고 물어봅니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옵니다. 잘 알죠. 이 사람, 허구한 날 여기 앉아서 약국 바라보고 그러던데. 감시 같달까요? 그때 미뤄뒀던 남자의 혈액형도 확인을 해봅니다. 당연히 A형이겠거니 했는데, 아닙니다. B형이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혈액형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근거와 범행을 이어줄 수 있는 연결고리로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위 사례는 이정빈 법의학 교수님께서 법과대학에서 법의학 수업을 하실 때 들려주신 내용을 기억에 의존해 적절히 편집, 재구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정답이 있다기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사례에 접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례를 해결해보기 위해서는 법의학적 지식이 조금 필요합니다. 첫째는 혈액형 유전입니다. ABO식에 따르면, A, B, O, AB형의 4종류가 있는데, 각각의 혈액에는 2개의 인자가 있습니다. 즉, A형은 AA, AO, B형은 BB, BO, O형은 OO입니다. 우열관계는 A, B가 우성, O가 열성입니다. 자녀의 혈액형은 부모의 혈액형 인자 중 하나씩 받아 결정되는데, 부모가 A형(AA, AO), O형(OO)이면, 자녀는 원칙적으로 A형(AO) 또는 O형(OO)일 것으로 예측됩니다. 둘째는, ‘방어흔(防禦痕, defense mark)’과 ‘주저흔(躊躇痕, hesitation mark)’의 구별입니다. 공격에 대항하여 자신을 보호하고자 무의식적으로 막게 될 때 생기는 방어흔은, 절박한 상황을 알려주듯 모양이 비일관적인 경우가 보통이라고 합니다. 한편, 자해를 할 때 생기는 주저흔은 스스로 상처를 입혀야 되는 구조적 한계로 인하여 주로 한 군데 모여 있고, 치명상이 아니면 얕고 평행이라고 합니다.

사례에서 부인의 상처는 ‘가슴팍에 가지런히’ 나 있다고 했습니다. 칼을 양손에 거꾸로 쥐고 가슴을 찌를 때 생길 수 있는 모양으로 보입니다. 법의학적 지식(방어흔과 주저흔의 구별)에 근거해보면, 부인은 스스로 자해했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생각해보면, 남자의 오른손에 묻은 흙은 아침까지도 씻겨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럴 정도로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남자가 범인이라기에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인은 스스로 자해를 하고 아이에게 해를 끼친 것일까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남자가 착각한 혈액형을 근거로 하나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혈액형을 A형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외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부인이 운영하는 약국 앞 카페에 출근해, 약국을 감시합니다. 부인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남자를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영문모를 의심을 받습니다. 부인은 이 모든 것이 아이 때문인 것 같아 아이를 괜히 탓하게 됩니다. 결국, 부인은 모든 고통을 마무리하고자 했고, 남자에 대한 원망으로 피 묻은 칼을 남자가 자고 있던 침대 위에 둔 것이라고 볼 가능성이 생깁니다.

법학과 의학이 교차하는 지점에 법의학이 있습니다. 법의학을 통해, 법조인과 의료인이라는 동질적이지 않은 두 집단이 서로의 전문성을 근거 삼아, 진실을 재구성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고자 합니다. 현대 법 실무에서 법의학이 가져다주는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고, 지금도 법의학으로 인해 상당한 사건들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법학은 본질적으로 규범학이므로 다른 학문과의 차별성을 가지나, 반대로 규범학이므로 다른 학문과의 통섭이 용이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의학 이외에도 법을 모두(冒頭)에 기재하는 학문, 예컨대 법경제학, 법사회학, 법철학 등을 상기해보면, 법의 범용성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은 다른 학문의 담론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릇을 채우기 위해서 법조인은 법만이 아닌 다른 학문까지 모두 섭렵할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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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2021-07-28 11:47:12
최신판례집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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