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29-속죄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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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29-속죄와 용서
  • 손호영
  • 승인 2021.07.1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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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소녀는 남자가 좋습니다. 집안에서 일하는 여사의 아들로 출신은 변변찮아도, 감출 수 없는 올곧은 기품과 탄탄한 매력에, 소녀는 첫사랑에 빠집니다. 남자는 소녀의 언니를 사모합니다. 넘을 수 없는 벽에 가로막혀 있다 여길 때도, 단단한 의지와 지치지 않는 성실함으로 언니의 마음을 얻습니다. 언니와 남자가 서로 사랑을 은밀히 속삭일 즈음, 소녀는 질투를 시작합니다.

집안에 세 들어 살던 친척 여자아이가 밤에 봉변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소녀가 범인으로 남자를 무고한 이유는 순전히 남자를 향한 원망과 언니에 대한 질투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소녀에게 재차 진실을 묻고, 소녀는 거듭 거짓을 확인해줍니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아래, 억울함에 사무친 채 감옥으로 갑니다.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사유는 입대였습니다. 2차대전 당시 영국군에 입대한 남자는 군이 붕괴하자, 절망 속에서 곧 덩케르크에서 진행될 거대한 철수 작전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철수 작전이 시행되기 직전, 남자는 결국 바라마지 않던 언니를 만나지 못하고 패혈증(septicaemia)으로 사망합니다. 언니도 불행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런던 공습을 피하고자 지하철 역(驛) 안으로 숨어들었던 언니는, 파열된 수도관에서 쏟아지는 물을 헤쳐나오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남자와 언니가 맞이한 파국에 소녀는 깊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를 하고자 합니다. 글쓰기에 매진했던 소녀는 작가가 되어 마지막 글로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남자와 언니는 재회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며, 자신은 담담히 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언 매큐언의 <어톤먼트(atonement)>는 소녀의 뒤늦은 죄책감과 속죄를 다룹니다. 소녀의 왜곡된 진심으로 비틀어진 결말은, 바꿀 수 없는 현실입니다. 소녀가 어렵사리 미안하다,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어도, 그 말을 받아줄 남자와 언니는 세상에 없습니다. 견고히 응어리진 죄책감을, 지어낸 이야기로나마 풀려고 한 소녀의 노력은 가상하나, 소용은 없습니다.

법도 속죄에 있어 시간과 방법상 제한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형사소송법 제232조 제1항, 제3항에 의하면 친고죄에 있어서의 고소의 취소 및 반의사불벌죄에 있어서 처벌을 희망하는 의사표시의 철회는 제1심 판결 선고 전까지만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피고인은 명예훼손과 모욕으로 기소되었는데, 기소 후 제1심 판결 선고 전 피해자로부터 합의서를 받습니다. 이에 사건은 모두 종료되겠거니 생각했겠지만, 대법원은 다르게 봅니다. “고소사건에 관한 이 사건 공소제기 후에 작성된 2011. 4. 27.자 합의서는 이 사건 공소가 제기되어 있는 제1심 법원에 제1심 판결 선고 전까지 제출되어야만 고소취소 및 처벌의사의 철회로서의 효력이 있다.”며, 합의서를 법원에 정식으로 제출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더해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제1심에서 증인으로 출석해서, ‘합의를 하기는 하였으나, 이 사건과는 별도’라며 피고인의 처벌을 원한다는 취지로 증언했고, 제2심에서 피해자는 ‘피고인이 더 이상 행패를 부리지 않는다면 그간의 일을 용서해 주겠다는 의미로 합의서를 작성한 것인데 피고인이 합의서 작성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에 관한 피고인의 처벌을 원한다.’는 의사를 명확히 표시했음을 되짚습니다. 대법원은 이를 근거로 이 사건에서 고소취소 및 처벌의사의 철회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고 보았고, 제2심이 이 사건 공소제기 후 이 사건 공소사실에 관한 고소취소 및 처벌의사의 철회가 있었다고 보아 이 부분 공소를 기각한 것은 법리오해임을 지적합니다(대법원 2011도17264 판결).

법 실무에서 말하는 ‘합의’의 그 속내는 실상 속죄와 용서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가해자의 반성과 이를 받아주는 피해자의 너그러움이 부합할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 곧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피고인은 합의서를 통해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면서, 피해자의 ‘고소취소 및 처벌의사의 철회’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합의가 갖추어야 할 본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서 밝힌 그의 분명한 의사를 우선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피고인에게는 진정한 속죄가 없고, 피해자에게는 가해자를 보듬을 마음이 없음을 알고는, 합의서의 의미를 축소 해석한 것입니다.

‘회복적 사법’을 새삼 주목할 이유는 이런 맥락입니다. 회복적 사법 구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참여를 전제로 한 치유와 회복을 이념으로 하여, 피해자는 자신과 가족이 감내해야 할 경제적·정신적 피해와 상처를 말하고 이에 대한 보상과 사과를 요구하며, 가해자는 범행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제공받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합니다. 물론 검토가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속죄와 용서, 나아가 화해의 의미를 세심히 살펴보는 것도 법원의 역할일 수 있겠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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