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오탈자의 눈으로 본 변호사시험 오탈제도의 위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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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오탈자의 눈으로 본 변호사시험 오탈제도의 위헌성
  • 이성진 기자
  • 승인 2021.06.23 13:26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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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은 나이에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5회에서 9회까지 변호사시험에 모두 불합격해 5년 내 5회 응시 기회를 모두 소진한, 소위 오탈자(五脫者)가 된 박세연 씨. 오탈자로 지낸 지난 1년 동안 변호사시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잊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는 고백과 함께, 이젠 예순이 넘은데다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라 다시 시험을 보는 것도 사실상 어렵지만 “악법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심정이라며 장고를 투고해 왔다. 이 글은 오탈제의 위헌성을 바탕으로 헌법재판소 결정을 비판한 것으로, 직접 피해당사자로서 느끼는 분노와 아픔을 그대로 담아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한다. 전문(全文)을 게재한다. 본지는 이에 대한 반박 또는 이해를 달리하는 독자투고, 각종 시험제도 등에 대한 의견개진도 열려 있음을 밝힌다. - 편집자 주 -
 

- 헌법재판소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박세연(61)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013년 입학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2016년 졸업
변호사시험 제5회 ~ 제9회 응시… 불합격

1년 전 나는 소위 오탈자가 되었다. 그 고약한 제도가 내 삶의 한가운데를 직격했고, 나는 몸을 가누지 못 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오탈자로 산 1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탈의 고통이 나의 몸과 마음을 짓이겼다. 어느 땐 칼에 벤 듯했고, 어느 순간엔 불에 덴 듯했다. 시간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도 상처는 그때만큼 깊고, 아픔 또한 가라앉을 줄 모른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지내는 동안 나는 오탈제도의 폐해를 절감했다. 그리고 이 기상천외한 악법을 한사코 지키려는 법무부와, 그 대역을 자임하는 헌법재판소의 행태에 대해 분노와 좌절감을 함께 느꼈다. 10, 20년 전에도 어딘가에 묻혀 있고, 무언가에 덮여 있던 기본권을 캐내고, 닦아내어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헌법재판소가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헌법재판소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이제 오탈제도가 왜 위헌이며, 헌법재판소 결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써보려 한다. 오탈제도의 피해자로서, 왜 이 제도가 이 나라 헌법질서와 마찰을 일으키는지 밝혀볼 것이다. 국가는 거듭 나에게 법률가로서 소양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끝내 시험장에서 내쫓았지만, 내 얄팍한 지식만으로도 이 야만적인 제도가 위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문제를 다루는 데 필요한 것은 전문적인 식견이 아니라 상식임을 말하고 싶어서다.

오탈제도의 위헌여부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려면 2016년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지만 그 외에 이렇다 할 결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탈자가 된 후 그 결정을 몇 차례 읽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내게 낯설다. 오탈제도를 긍정하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 헌법재판소가 동원한 온갖 언어 속에서 전혀 설득력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납득할 수 없는 논리로 채워진 그 결정이 기본권 수호기관인 헌법재판소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기 어렵다.

이 결정에 의문을 갖는 건 나만이 아니다. 재작년 변협이 개최한, 오탈제도에 관한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맡았던 정형근 교수는 2016년 결정이 최고 헌법재판기관의 헌법해석 수준에 부합되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헌법문제에 관한 유권적·최종적 해석기관인 헌법재판소가 고유한 법리를 제시하지 않고 법무부의 입법취지를 그대로 인용했다는 이유였다. 그가 점잖은 대학교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평가는 비판이라기보다 경멸이나 조롱에 가깝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같은 토론회의 토론자였던 류하경 변호사 역시 정형근 교수 못지않게 이 결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법무부와 헌법재판소가 누적합격률이란 수치를 빌려 변호사시험 합격률의 실상을 가리려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람의 누적사망률은 100%인데, 그것도 통계로서 가치를 가지느냐는 그의 되물음 속에 비웃음이 느껴졌다.

누적합격률 운운하는 얘기는 오탈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더 살펴보자. 변호사시험 시행 초기 법무부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정원의 75%인 1500명 정도를 합격시키겠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결과 불합격자가 빠르게 누적되었고, 합격률은 50% 전후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법무부는 그에 대한 개선책을 찾는 대신, 누적합격률은 그리 낮지 않다는 변명을 들고 나왔다. 합격률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합격률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라는 셈이었다. 마치 법무부가 하자고 들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는 주장 같기도 했다. 그렇게 매년 치러지는 시험의 합격률이 낮다는 불만을 누적합격률이라는 신개념으로 무마하는 시대가 닥쳤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헌법재판소가 법무부의 궁색한 해명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설명까지 보탠 사실이다. 헌법재판소의 말인즉, 통계에 따르면 장차 변호사시험의 누적합격률이 75%에 수렴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얘긴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헌법재판소가 왜 이런 무리수를 둘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여기엔 함수나 수열의 값이 특정한 수치에 무한히 접근할 때 쓰는, 수학 특유의 ‘수렴한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표현을 차치하더라도, 매년 응시인원과 합격인원이 달라지고 있는 상황에선 누적합격률이 특정한 비율에 특별히 가까이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수치가 75%를 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 어떤 규칙성이나, 경향이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다.

어쩌다 헌법재판소가 이런 황당한 소릴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써 변호사시험 합격률에 관한 논의의 본질은 잔뜩 흐려졌다. 오탈자의 발생을 논외로 해도, 졸업자의 반 정도가 1년에서 4년에 걸친 수험생활을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누적합격률은 낮지 않다는 흰소리를 늘어놓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다. 왜 변호사를 지망하는 사람은 의사나 치과의사 지망자와 달리, 절반 정도가 전문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도 최대 4년을 더 공부해야 하는 걸까? 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약사 시험은 단순합격률이 100% 가까워도 국민보건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왜 변호사시험은 그랬다간 큰일이 난다는 걸까? 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들을 설명한답시고, 우리 앞에 들이밀어진 게 바로 누적합격률이란 이름표를 단 괴이한 수치인 것이다.

이제 2016년 헌법재판소가 어떤 이유로 합헌결정을 했고, 그것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오탈제도에 관한 헌법소원심판의 초점은 이 제도가 청구인의 평등권이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지를 가리는 것인데, 먼저 평등권 침해 여부를 살펴본다.

당시 청구인들은 의사·약사·공인회계사·변리사·법무사·세무사·공인노무사 등의 자격시험에도 없고, 사법시험에도 없던 오탈조항을 변호사시험에 둔 것은 평등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다른 자격시험 응시자와 변호사시험 응시자는 차별취급이 문제되는 비교집단이 아니라고 답했다. 다른 시험은 응시자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평가방식이 변호사시험과 다르고, 또 다른 시험에서는 장기간 시험 준비로 인한 인력 낭비 문제의 심각성, 전문대학원에서의 교육과 자격시험 간 연계의 중요성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평등권 심사는 먼저 동질적인 집단 사이에 차별 취급이 있는지 심사하여, 그것이 인정될 경우 과잉금지원칙이나 자의금지원칙 위배여부를 따져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그 시험들은 변호사시험과 적절한 비교대상이 아니어서 차별의 존재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고, 당연히 다음 단계 검토를 할 필요도 없다고 답한 것이다.

시험마다 응시자에게 요구하는 능력이나 평가방식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시험을 거쳐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변호사시험과 다른 자격시험들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연유로, 다른 시험에 없는 제도를 변호사시험에서 강제하는 것이 평등권 침해가 아닌지 확인해 달라는데, 헌법재판소가 상상 밖의 답을 내놓은 것이다. 게다가 평가방식이 다르다는 표현 속에 의사시험, 치과의사시험 등은 절대평가제 자격시험인 반면, 변호사시험은 상대평가의 선발시험이어서 동질적이지 않다는 뜻이 포함된 거라면, 그건 오탈자를 한결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변호사시험이 당초 청사진과 달리, 선발시험으로 굳어진 건 법무부가 작심하고 어깃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오히려 그를 근거 삼아 평등권심사를 소홀히 한다면 오탈자들이 느끼는 고립무원의 아픔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호사시험에만 인력의 낭비문제의 심각성이 나타난다는 설명 역시 현실과 백만 광년은 떨어진 것이다. 응시자가 로스쿨 졸업자로 한정되어 있는 변호사시험에서는 과거 사법시험에서처럼 응시자가 폭증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일은 원천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당장 큰일이 날 것처럼 걱정을 늘어놓으며, 상황을 과장한다. 이 나라에는 변호사시험보다 응시인원은 많고, 합격자는 적은 시험이 숱하게 많다.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청년의 수는 족히 수십만을 헤아린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정부는 앞장서서 공무원시험의 열기를 부추겼다. 그 덕분에 멀쩡하게 직업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청년들이 직장을 내던지고 수험가로 뛰어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장기 수험생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국가가 한편에서 수십만의 청년들을 ‘공시열풍’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다른 한편에선 인력의 낭비를 방지한다며 기백 명을 상대로 천하의 악법을 강요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코미디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코미디보다 더 코믹한 것이 현실이라는 말은 한 치의 가감도 없는 진실인 것이다. 청구인들이 위헌을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변호사시험에만 인력의 낭비를 들먹이며 오탈제도를 둔 것이 평등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시험에는 인력의 낭비 문제가 없어서 비교대상이 아니라니, 마치 남의 나라 얘길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회계사, 세무사, 공인노무사 자격시험과 변호사시험이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의학전문대학원과 치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뒤 의사고시나 치과의사고시를 보는 집단과 법학전문대학원을 이수하고 변호사시험을 보는 집단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 사이에 비교집단으로서의 동질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헌법재판소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하는 홍길동도 아닐 텐데 말이다.

사법시험과 변호사시험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판단에도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은 이어진다. 헌법재판소는, 사법시험은 응시를 위해 로스쿨을 나올 필요가 없으므로 변호사시험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사법시험 재응시를 무제한 허용함으로써 발생한 인력낭비 등 문제를 극복하고자 변호사시험을 도입한 것이므로, 양 시험의 응시자를 동일한 비교집단으로 볼 수 없다는 기막힌 논리를 제시했다.

헌법재판소의 태도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법시험을 대체한 것은 단순히 변호사시험이 아니라 로스쿨제도를 전제한 변호사시험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다가도,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로스쿨을 끌어들이는 표변을 마다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법조인력 양성기관으로서 로스쿨의 존재를 긍정한다면 변호사시험의 합격률이 50%내외라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텐데, 헌법재판소는 거기에 대해선 어떤 의문도 제기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오탈제의 정당성 같은 문제에서는 어김없이 로스쿨의 도입배경을 거론한다. 태도의 변화가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태도가 어떠하든, 오탈제도의 평등권 침해와 관련하여 변호사시험과 사법시험을 비교대상으로 삼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어떤 시험의 응시자격을 얻기 위해 충족해야할 전제조건이 있다거나 도입 배경에 다른 시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고려가 있었다는 사실이, 합격자에게 자격을 부여한다는 시험의 본질을 다르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이렇게 상식과 거리 먼 판단을 한 것일까?

만약 다른 자격시험들과 변호사시험이 동질적인 것이고, 그 응시자들에게 비교집단으로서 적격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오탈제가 과잉금지원칙이나 자의금지원칙을 위배하여 평등권을 침해하는지 심사하여야 한다. 그 경우, 오탈제가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음을 부인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헌법재판소가 오탈제도를 부인하지 못 할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에 걸맞은 논리를 개발해낼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 헌법재판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이 궁색하고 낯 뜨거운 것이 될 거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변호사시험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어서 그런 사악한 규정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결국 헌법재판소가, 오탈제가 위헌이 아니라는 결론을 고수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러 시험을 변호사시험과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보다, 아예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쪽이 한층 편안하게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어떤 의중으로 그런 결정을 내놓았건, 변호사시험이 많은 시험 중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제대로 심사가 이루어졌다면 오탈제도가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직업의 자유 침해 여부에 관한 판단을 살펴보자.

헌법재판소는 직업의 자유 침해 여부에 대해 과잉금지원칙을 적용하여 판단하되, 국가에 국가자격제도에 대한 입법형성권이 있음을 이유로 유연하고 탄력적인 심사를 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 오탈제도가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합성, 피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을 함께 갖추지 못했을 경우 헌법에 위반되지만, 피해의 최소성은 다소 탄력적으로 심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08. 5. 2. 법무부가 작성한 변호사시험법 제정안에 따르면 오탈제도의 입법 목적은 ‘무제한 응시로 발생하는 국가인력의 낭비, 응시인원의 누적으로 인한 시험 합격률의 저하 및 법학전문대학원의 전문적인 교육효과 소멸 등을 방지하고, 자격취득시험으로서의 충실한 검정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이고, 헌법재판소는 이런 입법목적이 정당하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인력의 낭비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설명은 이렇다. ‘법학전문대학원의 도입취지는 교육을 통하여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전문법조인을 양성하고 응시생이 장기간 사법시험 준비에 빠져 있음으로 인한 인력의 극심한 낭비와 비효율성을 막는 데 있다. 응시기회제한조항의 입법목적은 이런 법학전문대학원의 도입취지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오탈제가 로스쿨의 도입취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므로, 그 입법목적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전혀 온당치 못한 것이다.

한때 사법시험 응시생이 급증하자 정부가 응시기회를 제한하려 한 적이 있다. 그때 헌법재판소는 응시기회제한조항에 위헌의 소지가 있다 하여 효력을 정지하는 가처분을 인용하였고, 결과적으로 정부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런데 2016년 헌법재판소는 오탈제도가 로스쿨제도와 결부될 때는 그 자체로 목적이 정당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기도 하거니와,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야기한다. 응시기회제한제도가 사법시험에 더해질 때는 위헌 소지를 안고 있었는데, 로스쿨제도에 더해지면 목적만큼은 저절로 정당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이전 사법시험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취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헌법재판소의 논리대로라면 변호사시험법에 어떤 조항을 추가하더라도, 그건 로스쿨 도입취지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입법목적이 정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이, 아니 그럴 수 없음이 명약관화하다. 다시 말해 로스쿨 도입취지가 변호사시험법에 있는 오탈규정이나, 다른 규정을 필연적으로 정당화시켜 줄 순 없는 것이다. 법학전문대학원설치법상의 로스쿨 제도가 이상적인 법조인양성시스템의 구축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오탈제도처럼 논란이 될 만한 제도는 필요 없다고 하는 쪽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은 로스쿨 제도와 변호사시험의 도입시기와 양자의 관계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로스쿨제도는 1990년대부터 긴 논의를 거쳐 도입된 것으로, 그 골자는 로스쿨을 설치하여 법학전문교육을 담당케 하고, 졸업자에게 자격시험인 변호사시험의 응시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먼저 로스쿨을 설립하여 신입생을 받고, 변호사시험법은 로스쿨 설립취지에 맞추어 제정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개혁의 초점이 로스쿨을 설치하여 법률인력의 충원방식을 바꾼다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선후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사법시험을 변호사시험이 대체했으니 오탈제도는 법학전문대학원 도입취지에 걸맞은 것이라고 하는 건 우격다짐일 뿐이다. 헌법재판소는 오히려 로스쿨제도의 기본법이라고 할 법학전문대학원설치법의 후속입법으로 마련된 변호사시험법에, 법학전문대학원설치법이 예정하지도 않았고, 그 취지와도 부합하지 않는 오탈제도를 둔 것이 체계정당성원리에 비추어 타당한 것인지 먼저 살폈어야 옳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두 개의 규범이 모두 형식적 법률이고 표면적으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법률가의 충원방식을 모집방식으로 바꾸기 위해 제정된 법학전문대학원설치법이 치열한 경쟁상황을 전제하는 응시기회제한제도와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과잉금지원칙을 준수하면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오탈제가 긍정되려면 시험을 계속 보겠다는 2,300명에게서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것이 공공복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즉 인력의 낭비 방지라는 목적이 공공복리상의 필요에 따른 것이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변호사시험의 장기 응시를 인력의 낭비라고 규정하여 금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금지하였을 때 인력의 낭비가 방지되었다고 할 만한, 공공복리상의 요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나라에 그 2,300명의 노동력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특별한 수요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 사람들을 시험에서 퇴출했을 때 그들과 관련하여 공공복리의 증진이라는 결과가 필연적으로 도출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물론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만약 특정시험에서 장기 수험생을 분리하는 것이 정말 공공복리에 기여를 한다면 이 나라에 오탈제도 비슷한 법률이 수백 개는 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시험을 제외하면 단 한 개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 이상한 입법목적은 정당하지도 않지만, 정상도 아니다. 그리고 이 제도가 특정 집단을 위해 복무한다는 의심을 피할 수도 없다.

‘응시인원의 누적으로 인한 시험합격률의 저하방지’라는 목적에 관해 보면, 현재 오탈제와 이보다 잘 어울리는 입법목적은 없지만, 입법 당시엔 사정이 달랐다. 그땐 법학전문대학원 설립취지를 살려 변호사시험을 자격시험으로 하고, 응시자의 80%전후를 합격하게 한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 국회 법사위 회의에서 오탈제도가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일부 위원의 지적에 대해, 변호사시험법을 성안한 법조인력양성제도개선소위원회 위원장이 응시자의 80% 정도가 합격할 것이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설명한 일이 있는 걸 보아도, 그러한 공감대가 굳건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오탈조항은 입법 당시만 해도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제도가 될 것으로 보였으나, 법률 시행과정에서 법무부가 당초의 컨센서스를 깨고 합격률을 ‘입학정원의 75%’로 낮춤으로써, 피비린내를 풍기는 조항으로 바뀐 것이다.

법무부가 자의적으로 변호사시험의 합격률을 낮춰버린 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어렵게 도입한 로스쿨제도의 정상적 운영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합격률에 급급한 로스쿨들이 변호사시험에 출제되지 않는 과목은 강의를 개설하지 않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추세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로스쿨 안에서 아카데믹한 분위기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죽하면 로스쿨이 변호사시험 학원으로 변질되었다고 하겠는가? 변호사시험의 합격률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졸업반 학생의 졸업을 유예시키는 현상도 심각하다. 간략히 말해 이 정도지만, 지금 이 나라의 로스쿨 제도는 붕괴 직전인 일본 로스쿨 제도의 몰락과정을 차근하게 따라가고 있다.

그럼에도 법무부는 이런 현상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변호사단체와 로스쿨 사이에서 합격자의 숫자만 적당히 컨트롤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것이 법무부의 인식이다. 법학교육의 정상화라는 로스쿨 도입의 비전은 그들과 무관한 것인가?

이제 마지막 입법목적을 보자. 헌법재판소는 ‘법학전문대학원의 전문적인 교육효과 소멸 등을 방지’한다는 입법목적에 대해 의미를 알기 어려운 설명을 하고 있다. 옮기면 이렇다. “입법자는 법학전문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이후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교육효과가 점점 줄어든다고 보아서 일정기간이 지난 이후에 변호사시험의 준비나 합격이 법학전문대학원에서의 교육의 충실한 이수와는 시간이 갈수록 멀어지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지금도 이해하지 못 한다. 법학전문대학원 졸업 뒤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효과가 줄어든다는 얘기에 동의하진 않아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다. 그런데 ‘일정기간이 지난 이후에 변호사시험의 준비나 합격이 법전원에서의 교육의 충실한 이수와는 시간이 갈수록 멀어지는 것으로 판단’했다는 부분은 갖은 애를 써도 의미를 알 수 없다. 오래 시험 준비를 하거나, 뒤늦게 합격하면 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소급적으로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된다는 뜻인가? 뭔가 소급하여 효력이 없어지는 일 따위가 법기술 차원을 넘어 우리 일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란 말인가?

변호사시험법의 제정에 관여했던 누군가 머리를 짜내어 교육효과 소멸 운운하는 문구를 떠올렸을 때, 어쩌면 그는 10년 전 이미 낙제점을 받았던 제도의 입법목적에 새로운 한 줄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건 그야말로 난센스다. 교육을 통해 익힌 지식이나 기술이라도 답보하거나 퇴보할 수 있지만, 1년 내내 수험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교육효과의 소멸을 얘기한다는 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게다가 지금은 저런 소리를 입에 올릴 여지조차 없다. 로스쿨에서 수험용 지식 외에 교육효과를 말할 만한 것을 가르치지 않은 지 오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저처럼 황당한 목적을 들먹이며 입법을 했으니, 그에 대한 설명도 어처구니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나면 교육효과가 소멸되므로, 그 이후에 공부를 하거나 심지어 합격하는 것도 인정하지 말아야 된다는, 이 기막힌 주장은 우리에게 어떻게 악법이 제정되는가를 실증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입법목적을 모두 살펴보았다. 결국 오탈제도의 입법목적들은 한결같이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양보해도, 이 중 합격률의 유지에 필요하다는 부분을 제외하면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 합격률의 유지라는 부분 역시 로스쿨의 도입취지와 근본적으로 거리가 멀고, 법무부의 악의적 행태가 없었다면 굳이 오탈제를 통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을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2016년 헌법재판소는 오탈제도가 입법목적의 정당성을 결여하여 위헌이라고 선언했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한 데 이어, 별다른 설명 없이 오탈제도가 입법재량의 범위 내에 있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하였다.

수단의 적합성은 입법수단이 입법목적의 실현을 용이하게 하거나 촉진하는 경우에 인정된다. 그것이 최적화된 수단이 아니더라도, 전적으로 부적합하거나 근본적으로 부적합하지 않다면 적절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제대군인가산점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법리를 구축했다. 즉 어떤 정책수단이 헌법과, 이를 구체화하고 있는 전체 법체계와 저촉된다면 수단으로서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다고 하였다. 기실 이런 법리는 법치국가에선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리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그러한 법리를 헌법재판소가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헌법재판소가 제대군인가산점 사건에서 펼친 논리는 구체적으로 이런 것이었다. 제대군인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은 어떤 헌법적 근거도 없다. 반면 이 제도로 인해 주로 피해를 받게 되는 여성과, 군에 입대할 수 없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와 특별한 보호는 헌법과, 그를 구체화하는 전체 법체계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군인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은 헌법과, 그를 구체화하는 전체 법체계에 위배되는 수단을 택한 것으로, 정책수단으로서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법리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오탈제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32조는 모든 국민에게 근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즉 국민은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직업에 취업하여 종사할 수 있고,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에 대해 취업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그에 따라, 국가는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근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할 의무를, 소극적으로는 개인이 자유롭게 일할 기회를 제한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의무를 부담한다. 그런데 오탈제도는 이 근로의 권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수단을 택하고 있다. 어떤 헌법적 근거도 없이 국민의 취업 기회를 국가가 직접 제한하는 방법을 수단으로 택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자격제도의 형성에 관해 국가에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이 있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이 위헌적인 수단까지 용인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오탈제가 위헌적인 수단이라는 점은 현재처럼 변호사시험이 상대평가의 경쟁시험으로 운용될 때 한결 두드러진다. 응시자격을 박탈당하는 사람 대다수는 변호사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1회 변호사시험 직후 법무부가 변호사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점수로 제시했던 720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탈자 중에 그 점수에 미달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변호사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경쟁에서 배제하는 수단이 그들의 근로의 권리를 침해하는 위헌적인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재론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특정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 특정 자격의 취득을 요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처럼, 오탈제도의 입법목적이 무엇이건 수단의 적합성을 인정할 수 없지만, 법무부와 헌법재판소가 입법목적 중에서도 특별히 인력의 낭비 방지라는 어구에 방점을 찍고 있으므로, 그에 관해 사족을 하나 붙인다. 가정에 가정을 더하여 인력의 낭비 방지라는 목적이 정당하고, 오탈제도가 우리 헌법, 우리 법체계와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과연 오탈제도는 인력의 낭비 방지를 위한 실효성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을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오탈제가 헌법적으로 용인된다고 하더라도, 특정 인력의 낭비를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국가가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인력을 변호사시험의 장으로부터 퇴출시키는 것뿐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국가는 국민을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도록 강요할 권한이 없고, 인력의 낭비방지를 이유로 들어 국민의 직업이나 직장을 바꾸게 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응시기회를 빼앗긴 수험생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국가는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소위 ‘인력’으로서 적절하게 활용될 기회가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예측도 할 수 없다. 결국 오탈제도를 통해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탈자가 다시 시험장에 얼굴을 내미는 것뿐이다. 물론 친절한 국가는 그들이 더 이상 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된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노동력을 더 값지게 쓰기를 간절히 기대하거나 희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인력의 낭비 방지라는 거창한 목적을 실제로 달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처럼 국가인력의 낭비 방지라는 목적으로 응시기회를 제한하는 입법을 한다고 하여도, 장기 수험생을 시험으로부터 퇴출하는 것 외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고, 또 효과의 달성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다. 결국 오탈제는 인력의 낭비 방지라는 입법목적과 관련해서는 전혀 적절한 수단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수단의 적절성과 관련하여,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왜 국가가 이런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을 고집하는가하는 점이다. 위에서 밝힌 대로 이 제도의 입법목적이라고 주장되는 것들은 합격률의 유지라는 부분을 제외하면 허무맹랑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합격률 유지라는 부분이 국가의 대의에 적합한 것이라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지극히 당당하고 상식적인 방법이 따로 있다. 합격자를 늘리는 것이다. 사실 현재와 같은 합격률을 유지하기 위해 합격자를 늘리더라도, 증원할 숫자는 불과 2, 300명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변호사시험 초기부터 현재의 합격인원만큼만 합격시켜왔다면 변호사시험과 관련하여 드러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애초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상식 이하의 수단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의 역할을 행하는 사람들의 반성과, 사고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 문제와 관련, 침해의 최소성은 그 의미가 다소 축소된다. 전문직 자격제도에 대해 국가가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두 가지만 짧게 언급한다.

헌법재판소는 오탈자가 다시 로스쿨에 진학하더라도 변호사시험 재응시를 허용할 수 없다고 한다. 오탈자라면 누구나 오탈이라는 결과를 용납하기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다시 로스쿨에 입학하려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는 재응시를 허용하게 되면 무제한 응시로 인한 인력의 낭비, 응시인원의 누적으로 인한 합격률의 저하현상이 발생할까봐 두렵다는 것이다. 법무부가, 오랜 기간 입법·행정·사법부가 토론과 협의를 거쳐 이루어낸 결실인 로스쿨을 변호사시험 5년 한시 5회 응시권을 발행하는 쿠폰판매소 정도로 전락시켰는데, 거기에 헌법재판소가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다. 쿠폰은 1인 1회 한정.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선 헌법재판소의 집착에 그저 혀를 내두르게 된다.

또 헌법재판소는 외국에도 응시기회제한제도가 있다고 강변하지만, 미국의 경우 연방 내에서도 제한이 있는 주와 없는 주가 있어 우회가 가능하고, 독일의 경우 두 번의 시험이 법대 수료와 실무수습 종료 시점에 행해져 각각 졸업시험과 변호사 자격시험의 성격을 가지며, 자격시험의 경우 불합격자가 많지 않다는 점 등을 모두 고려하면, 우리의 경우 피해의 최소성 측면에서 그들과 사정이 많이 다른 게 사실이다. 수입하는 모든 제도를 기형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본의 경우는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법익의 균형성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보자. 헌법재판소는 ‘변호사시험에 무제한 응시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인력의 낭비, 응시인원 누적으로 인한 합격률의 저하 및 법학전문대학원의 전문적인 교육효과 소멸 등을 방지하고자 하는 공익은 청구인들의 제한되는 기본권에 비하여 더욱 중대하다. 따라서 법익의 균형성도 인정된다.’라고 하여, 법익의 균형성을 인정하였다.

선례들을 보면, 과잉금지원칙 심사에서 침해의 최소성이 충족되면 법익의 균형성도 갖춰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법익의 균형성은 엄연히 과잉금지원칙을 이루는 한 분면이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전문자격제도에 관해선 국가의 입법형성권 존중 차원에서 침해의 최소성을 유연하게 심사할 수 있다고 해왔지만, 법익의 균형성에 대해 그런 언급을 한 적은 없다. 법익의 균형성에 관해서는 다른 어떤 요소도 고려함이 없이 공익과 사익을 엄격하게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뜻일 것이다. 또 침해의 최소성에 대한 판단을 유연하게 하였을 경우에는 법익의 균형성은 보다 엄격하게 심사해야 옳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어떤 법적 수단이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정도까지 이르지 못한 경우에도, 그를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법익의 균형문제는 한결 까다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는 오탈자가 더 이상 시험을 볼 수 없게 된 사실을 기계적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파괴될 수도 있다는 점뿐 아니라, 이 제도와 관련하여 공익이란 건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극히 미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다 섬세하게 살폈어야 할 것이다.

어느 오탈자의 발언이 기억난다.

“저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이 나라에서 변호사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이 짧은 문장이 오탈제도에 의해 보호되는 어떤 공익도 이 한 사람의 사익보다 클 수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가 죽어도 현재의 정체성을 지닌 채 이 땅에 다시 태어날 수는 없으므로, 이 악법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이 나라에서 법조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직면한 절대적 비극이고, 오탈제도로 인해 잃게 되는 사익인 것이다. 어차피 어느 시점이 지나면 그들이 제 발로 떠난다는 사실,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것과 쫓겨나는 것은 천양지차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는데, 한 줌도 안 되는 공익을 위해 이런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은 너무 고약하지 않은가?

나는 헌법재판관들에게 그 청년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치열하게 상상해볼 것을 권한다. 그래서 그 아픔의 1만분의 1이라도 실감을 할 수 있다면, 바른 답을 다시 써내려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오탈제도의 공익은 사익보다 중대하다란 말을 심적 동요를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라고 그들에게 한 국가가 허용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헌법재판소가 악법을 수호함으로써 청년들의 꿈을 무자비하게 꺾어 버리는 ‘꼰대들의 법정’으로 인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무리 헌법재판소의 재판이라고 하더라도,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고 당대의 인권의식을 반영하지 못하면 결국 고집 센 늙은이들의 언어유희쯤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점을 꼭 말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오탈제도가 어떻게 평등권과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지 드러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적지 않다. 오탈제도의 위헌성을 낱낱이 지적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나라 헌법수호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어떤 이해집단에도 기울지 않고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라는 점을 환기하며, 나의 작은 노력을 매듭지으려 한다.

이제야 얘기하지만 나는 꽤 나이가 들었다. 아직 노인은 아니지만, 장년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철없는 선택으로 쉰이 넘은 나이에 로스쿨을 가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나를 입학시켜 준 학교에 누를 끼치고 있다. 그리고 아쉽게도 내가 이 사태를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악법이 오늘 당장 없어지더라도 내가 다시 시험장에 들어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미 나이는 나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청년처럼 열정적으로는 못 해도 그럭저럭 책을 읽는 흉내를 낼 수 있었지만, 닷새 총 1,250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지력과 체력을 극한까지 끌어내야 하는 변호사시험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진작 넘어섰다. 긴장과 위기감 속에서, 느려터지고 쉬 지치는 뇌에 채찍질을 해가며 끝도 없는 문제 사이를 헤매는 일은 하루가 채 끝나기 전에 나를 완전한 번 아웃 상태로 이끌곤 했다. 그러면 남은 날, 남은 시험은 꿈길을 걷는 것처럼 아득한 상태로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오탈을 앞두고 마지막 시험을 치렀던 날 나는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다시는 그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에 안도했다. 그런데 정작 내게 오탈자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지자 비참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험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지독하게 고통스러웠지만, 이 유쾌하지 못한 사태를 뒤집을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타인의 분쟁에 개입하면서 살아가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나이 먹은 사람의 정신건강에 좋을 리 없다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누군가 나의 바깥에서 내 선택을 망가뜨린 사실에조차 관대해질 순 없었다. 다시 시험장에 가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 어떤 기회로서 그것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물론 이것은 감정적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성보다 감정을 더 위에 놓고 살아가고, 그 역시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익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언젠가 이 천하의 악법도 사라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시험이 끝날 때마다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자격을 새로 얻은 오탈자들이 등장하여 공분을 쏟아낼 것이고, 헌법재판소는 이 문제와 간단없이 맞닥뜨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헌법재판소 전력에 새겨진 오점을 되돌아보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 나라 헌법재판소를 향해 간곡히 부탁한다. 이 나라가 오탈자들에게서, 나에게서 빼앗아간 것을 돌려주길 바란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야만은 이제 끝나야 한다.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행해지는 수백, 수천의 시험 중에서 변호사시험에만 이 제도를 두는 이유를 한 점 의심도 남지 않게 설명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권위만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기대는 것으로, 이 문제를 둘러싼 분란을 가라앉히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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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중 2022-02-17 23:53:38
로스쿨 도입 취지에 따르려면 의사국가고시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80%이상의 합격률이 나와야 한다.
인력낭비를 우려해 탈자제도를 만든다고 해도 십탈자 정도로 했으면 수긍이 갔을 터인데..
헌재가 이리저리 법리를 갖다붙이긴 하는데 결국 기득권 수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지나가다 2021-12-26 00:38:05
법대 졸업 후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데요. 2008년~2010년 경 사법시험을 준비했었기 때문에 이 바닥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으로서 변시 오탈자들에 대한 응시제한(횟수&기간)이 풀리는 법안이 통과됬으면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기 오탈자들에 대해서도 소급적용되야 맞구요. 변호사시험 응시자 대비 합격률도 로스쿨 취지에 맞게 상향조정되고. 살인적인 변호사시험 일정과 과목 수도 개편될 필요성은 있어 보이네요. 방통대 로스쿨과 사법시험 부활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보지만, 우회로 제도는 필요하다 생각하구요. 현 로스쿨 제도의 운영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전면개편도 동시에 진행됬으면 합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각 정당 대선 후보 캠프에 이 부분에 대한 의견제기해보시고, 사회적으로도 공론화해보시길..

서울시민 2021-07-12 10:11:33
다 필요없고, 로스쿨 없애고 사법시험 부활시켜라~!
국민들 대다수가 사법시험 부활에 찬성한다.

유대진 2021-06-25 10:47:35
변시 오탈문제와 합격률문제 해결을 주장하려면

로스쿨 정원 축소 주장을 먼저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b 2021-06-24 19:52:10
당장 10회변시 문제점도 해결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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