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허수아비는 왜 바다로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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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수아비는 왜 바다로 떠났을까
  • 최용성
  • 승인 2021.06.0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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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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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너도 버려진 놈이구나.” 강물을 떠내려가던 허수아비를 건져낸 공허한 눈빛의 남자가 내뱉은 한마디. 그것이 시작이었다. 버려질지 모른다는 느낌만으로도 사람은 불안 또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심리학에서 유기불안 또는 유기공포라고 부르는 상태이다. 개인에게 닥친 심각한 사건, 주로 부모와의 불안정한 관계, 배우자나 파트너와의 이별, 가족과의 단절, 따돌림, 사회적 고립 등이 그 공포를 만든다. 이 공포는 생애 내내 따라다니기도 한다. 우울증을 유발하고, 관계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의존·집착하게 한다. 그렇게 자신을 고립시켜 간다. 다른 차원의 버려짐도 있다. 십자가 위의 예수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한 것처럼, 신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는 것. 버려짐은 실로 존재의 근본을 흔드는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그는 물에 떠내려가는 허수아비도 자신처럼 버려진 존재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버려짐이 새로운 기회일 수 있음을. 처음에 허수아비는 자신을 버린 아이가 미웠지만, 물에 떠내려가면서 가을 하늘, 강둑 위 나무, 춤추는 새떼들을 보며 자유로워짐에 아이에게 고마워했다. 그렇게 허수아비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집 마당에 자리 잡으며 허수아비는 사람들처럼 주인이 되어 내 뜻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그에게 주변의 사물들이 말을 걸어온다.

CCTV는, 사람이 눈을 통해 시각적 정보를 뇌에 담아내듯이, 세상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 저장하고 기억하므로 스스로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CCTV는 옛날 부잣집 지하실 금고에서 침입자를 발견하고 자동총에 발사명령을 내린 일을 자랑한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침입자는 금고를 노린 게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였던 CCTV는 두 남녀 사이에 일어난 일을 본 친구 CCTV의 이야기를 통하여 도구의 한계 내에서 보는 점에서 사람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이번에는 감나무가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도, 삶의 주인도 아니라며 라캉을 흉내 내 이야기한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희망은 타인의 것이거나 사회와 관습이 준 욕망을 받아들여 그저 따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래서 그냥 주어진 삶을 즐기면 될 일이라는 감나무는 허수아비가 바다를 꿈꾸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리 사냥개가 끼어든다. 사람이 개에 의존하여 산다면서, 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친부를 여읜 아들 진혁을 키우는 미순과 매 맞는 개 누렁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나무는 “인간은 사실 하나의 질병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며 ‘나’가 고통의 원인이고 그것을 넘기 위하여 ‘무아’를 추구하는 인간의 꿈은 쾌락도, 욕망도, 고통도, 행복도 없는 로봇인 반면 로봇의 꿈은, 허수아비처럼, 인간이라고 말한다.

늙은 라일락 나무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의 욕망을 매년 4월 예쁜 꽃을 피우려는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사람은 끊임없는 칭찬과 비난을 받는 과정에서 태어나며, 때로는 칭찬과 비난에 지쳐 스스로 죽기를 원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자 대나무가 부족함이 사람다움을 만든다면서 들뢰즈를 흉내 내 아무리 채워도 다시 나타나는 부족함을 채우려는 욕구가 순환해야 자아가 만들어지고 사람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CCTV는 자아를 극복했다는 성인을 내세워 반론한다. 혼란스러운 허수아비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 주체적이지 않으냐고 묻는다. 감나무가 답한다. 사람들은 나라는 관념을 갖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고 평생 진짜 나를 찾지 못한 채 생을 마치게 된다고. 인간다운 삶은 참다운 자아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미국에 살았던 보석세공업자 폴의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사물들의 철학적 대화는 사물들이 보거나 들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맞물려 돌아간다.

다시 공허한 눈빛의 그가 있다. 댓잎 하나 떨어진 밤에 “너희가 추구한 생명과 쾌락이야말로 역사가 넘고자 한 고통의 근원이 아니었더냐”라고 외치며 나무에 도끼를 휘두른 그는 “나는 언제나 의미에 목말랐다. 나는 언제나 사랑에 목말랐다…의미와 진리는 오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겠지. 그런 모든 관계를 놓친 나는 어디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면서 뭔가 굳은 결심을 한다.

존재는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진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길은 무척 험하고 힘들다. 그래도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빅토르 프랑클은 한계상황에서도 인간이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의지에서 비롯됨을 깨닫고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공허한 눈빛의 그 남자는, 허수아비는 어떤 의미를 찾았을까, 버려짐의 공포를 뛰어넘었을까? 사물들이 들려주는 사람들의 사연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오랜 벗인 철학자 임판 변호사의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지식공감, 2018년)를 다시 읽으며 철학적 사유와 가슴 시린 이야기가 절묘하게 만나는 거대한 장(場) 속에 들어간 나는 새로이 의미를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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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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