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법 실무(31)-변호사와 언어에 대한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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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법 실무(31)-변호사와 언어에 대한 감수성
  • 박준연
  • 승인 2021.05.2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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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
박준연 미국변호사

지금은 은퇴하신 선배 변호사와 일하면서 가끔 내부 조사를 위한 증인 인터뷰, 미국 소송 데포지션 준비 미팅 등에서 통역의 역할을 하곤 했다.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인터뷰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만,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의 경우나 증인이 어느 정도 영어를 하는 경우는 내가 선배 변호사의 질문도 우리말이나 일본어로 옮기고, 내가 궁금한 부분도 따로 질문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때마다 그 선배는 인사와 소개를 하면서 자신은 이상한 영어(broken English)만 말하는 것이 고작이지만 나 빼고 우리 팀은 다 대단한 사람들이라 다언어를 구사한다고 자랑스럽게 설명하곤 했다. 그런데도 인터뷰 진행 중에 이 선배가 잠깐, 잘못 옮긴 것 같은데 하고 지적을 할 때가 있었다. 분명히 영어 밖에 못하는 이 선배가 어떻게 아는지 좀 더 원활하게 진행될까 싶어서 살짝 뉘앙스를 바꾸어 말한 부분까지 잡아내는 것이었다. 그 선배와 업무를 많이 하고 나서, 그게 논의의 흐름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표정까지 면밀히 관찰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변호사의 자질 중 하나가 말과 글의 작은 부분에까지 집중, 심지어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단순하게 꼬투리를 잡거나 시비를 걸기 위해 말과 글의 뉘앙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과 글의 법적 함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이 점을 특히 절감한 것은 뉴욕에서 도쿄로 옮겨와서 바로 카르텔 소송 관련 업무를 하면서였다. 각 기업의 문화에 따라 다른 부분도 있지만, 특히 영업 업무를 하는 임직원들은 고객과의 논의 사항, 내부 협의 내용을 방대한 양의 이메일과 문서로 남기는 경우가 많다. 의미가 불분명한 부분, 특히 법적으로 중요한 부분 (예컨대, 담합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문서를 작성한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작성자가 회사를 그만둔 경우도 있고, 문서 작성자 본인이 정확하게 어떤 의도로 그 문서를 작성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쪽 문서가 아니고 소송 상대방이 제출한 문서라면 특정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이냐고 물어볼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다. 이때 언어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의미를 왜곡하는 일 없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과 법적 해석을 연결 짓는 능력이다.

그 중 한 예가 은어의 사용이다. 불법이라거나 꺼림칙하다는 이유로만 은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조직 내부에서 사용해서 일체감을 강화하기 위해서, 아니면 딱히 필요는 없는데 단지 재미있어서, 다른 사람들 모두가 쓰니까 쓰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외교부에 입부했을 때, 처음 “평가하다”는 동사의 특이한 용례를 알게 되었다. 회의 자료를 준비할 때 “양국의 관계 발전을 평가하고” 하는 표현을 쓰는데, 이건 좋고 나쁜지 평가하다(evaluate)는 의미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이해하다(appreciate)는 의미에 가깝다는 것을 처음에는 쉽게 파악하지 못했다. 다시 문서를 검토하는 변호사의 입장으로 돌아오면, 같은 회사 내에서도 하나의 대상에 대해 여러 은어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억에 남는 사례 중 하나는 도형이나 모양을 거론하면서 가격 추세를 거론하는 이메일이었다. 문맥상으로 보면 분명히 경쟁사를 지칭하는데 어느 회사를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료들과도 이야기해보고 고민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파악하고 있는 경쟁사의 기업 로고를 검색하여 찾아보고 이메일과 비교해본 후에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 이렇게 반짝 발견을 하면 탐정 낸시 드류 캐릭터의 삽화를 보내주는 동료도 있었다.

ALTA라는 외국어 테스트가 있다. 소송 과정에서 영어 외의 언어로 된 문서를 리뷰하여 제출하는 업무를 하는 변호사라면 해당 언어로 문서 리뷰를 하기 위한 최소한의 언어 능력 테스트로 자주 사용되는 이 시험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해당 언어로 문서를 리뷰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 표준화된 시험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디스커버리 과정을 총괄하는 변호사의 입장에서, 표준화 시험 통과가 반드시 그 언어의 뉘앙스와 법적 함의까지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문서 리뷰를 총괄하는 변호사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혹여 중요한 부분의 뉘앙스나 법적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이에 대해 적시에 피드백을 제공하고 팀 내에서 이를 공유하는 것이 좋다.

변호사의 숙명이 글, 말과 씨름하는 것이라면 다언어를 구사하는 변호사의 숙명은 안건에 따라서 여러 언어로 된 글, 말과 씨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주니어 변호사 시절에는 뭔가를 쓸 때나 말할 때 이런저런 지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건 일종의 트레이닝이라고도 하겠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변호사라도 신중을 기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팀원 변호사들의 의견을 구하고 납득할 때까지 대화를 계속하기도 한다. 안건과 상황에 따라 영어, 우리말, 일본어의 언어 모드를 바꿀 뿐 아니라, 그 안건의 내용에 따른 그 안건만의 언어가 있고, 그런 면에서 여러 언어와의 씨름은 끝이 없다.

■ 박준연 미국변호사는...
2002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수석 합격한 재원이다. 3년간 외무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최상위권 로스쿨인 NYU 로스쿨 JD 과정에 입학하여 2009년 NYU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Kelley Drye & Warren LLP’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로펌 중의 하나인 ‘Latham & Watkins’ 로펌의 도쿄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필자 이메일: jun.park@l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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