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21-우연과 행운 사이
상태바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21-우연과 행운 사이
  • 손호영
  • 승인 2021.05.21 1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몇 년 전, 택시를 탔을 때입니다. 조그만 종이 몇 장을 꼭 쥔 채 핸들을 잡고 운전하는 기사님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슬며시 보니 로또 종이이길래,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로또 당첨 잘 되시나요? 저도 종종 사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기사님은 손사래를 치면서 답했습니다. “옛날에는 당첨 잘 되었는데, 요즘은 잘 안되네요. 예전에 2, 3등 몇 번 했거든요. 1등이 안 나오네요.” “2, 3등 되셨었어요? 대단하시네요. 그것도 되기 힘든 것 아니에요?” “그래도 1등을 해봐야죠. 1등 나올 때까지 하려고요. 저는 당첨해서 받은 돈과 택시하면서 번 돈 모두 로또 삽니다.”

로또 안 산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산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로또 몇 번 사면 가끔 소액이 되기도 합니다. 괜히 공짜 상금 같아서 고스란히 다시 로또에 재투자(?)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 하는 말이, 월요일에 로또를 사면, 추첨일인 토요일까지는 행복하다고 하는데, 수학적으로 미세한 확률에 혹시, 설마, 만약과 같은 상상과 기대를 거듭 곱하면, 마음이 부푸는 상황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연한 이익을 얻고자 요행을 바라거나 노리는 성질”이라는 사행성은, 그 안에 속한 ‘행운’ 때문에 매혹적이고 ‘우연’ 때문에 위험합니다. 45개 숫자 중 6개를 맞추라는, 지극히 단순한 로또가 기사님으로 하여금 당첨금과 택시로 번 돈을 모두 사용하게 할진대, 면대면으로 제법 복잡한 룰 속에서 행운을 바라는 도박이 사람을 이끄는 힘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할까요. 거기에 자신이 타짜라는 등의 잘못된 믿음까지 더해지면, 그가 감당할 위험은 어느 정도일까요.

어떤 사람이 약 3년 6개월(1326일)간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바카라 도박게임을 합니다. 333회에 걸쳐 카지노에 출입하였으니, 나흘에 한 번꼴입니다. 카지노에 출입한 지 약 두 달 뒤부터, V-VIP 고객으로 게임에 참여한 그는 종내 약 231억 원을 잃습니다. 그러니까, 231만 원이 아니라 231억 원입니다. 베팅한도액이 1회 1,000만 원인데, 병정(자기 돈으로 게임하지 않고 타인 돈으로 타인을 위하여 베팅만 대신 해주는 사람)을 세워 베팅한도액을 초과해서까지 게임을 한 결과입니다.

그의 아들은 강원랜드에 아버지의 카지노 출입을 금지시켜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폐광지역 카지노사업자의 영업준칙’에 따른 출입제한규정은 카지노 이용자가 이미 도박 중독의 징후를 드러내고 스스로 사행심을 제어할 수 없어서 과도한 재산상실의 위험이 현저히 커진 경우 가족의 요청으로 카지노 이용자의 카지노 출입을 제한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곧 그의 아들은 강원랜드에 아버지의 출입제한 요청을 철회한다는 연락을 하였습니다.

이후 큰 돈을 잃은 그는 강원랜드를 상대로, 강원래드가 대리베팅을 묵인한 잘못이 있고, 아들이 출입제한요청을 하였음에도 자신을 들여보내 출입제한규정을 위반한 잘못이 있다며, 강원랜드에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하게 됩니다.

대법원은, 도박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책임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하면서 논리를 전개합니다. 즉, “개인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 행위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귀속시키거나 전가하지 아니한 채 스스로 이를 감수하여야 한다는 ‘자기책임의 원칙’이 개인의 법률관계에 대하여 적용되고, 계약을 둘러싼 법률관계에서도 당사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 계약을 체결한 결과 발생하게 되는 이익이나 손실을 스스로 감수하여야 할 뿐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 당사자에게 손실이 발생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등 상대방 당사자의 이익을 보호하거나 배려할 일반적인 의무는 부담하지 아니함이 원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① 그에 대한 출입제한 요청서를 강원랜드가 접수하여 그에 대하여 출입제한자로 등록하기 전에 아들이 그 요청을 철회하였으니, 그에 대한 적법한 출입제한 요청조차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따라서 강원랜드에게 그의 카지노 출입을 제한할 의무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② 1회 베팅한도를 제한하는 규정은 그 문언상 과도한 사행심 유발을 방지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이 규정이 일반 공중의 사행심 유발을 방지하기 위한 데서 더 나아가 카지노 이용자 개개인의 재산상 손실을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강원랜드 소속 직원들이 베팅한도액 제한규정을 위반하였더라도 강원랜드가 영업정지 등 행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그러한 사정만으로 그에 대한 보호의무를 위반하여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먼 옛날 송(宋)나라 농부가 풀 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토끼가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엉겁결에 토끼를 얻은 농부는 이제 매일같이 그루터기 옆에 앉아 튀어나올 토끼를 기다립니다. 토끼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동안 그가 일구던 밭은 황폐해져 못쓰게 됩니다. 수주대토(守株待兔)의 고사는 지금도 새겨들을 만합니다. 우연과 행운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책임입니다(자기책임).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