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7-이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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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7-이름의 의미
  • 손호영
  • 승인 2021.04.2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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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1. 이사를 하러 차를 타고 이동 중이던 치히로(千尋) 가족은 터널 너머 신비한 마을에 들어섭니다. 불길한 마음을 느낀 치히로는 떠나자 하나, 부모님은 주인 없는 음식을 먹기 바쁩니다.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님은 어느새 돼지로 변하고,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사방을 가득 채웁니다. 치히로는 뜻하지 않게 마을에 머물러야 하여 목욕탕 일을 구합니다. 그때 목욕탕 주인 유바바가 치히로의 일자리를 허락하며 말합니다. “치히로가 너의 이름이냐? 사치스러운 이름이구나. 네 이름은 이제부터 센(千)이다.” 그렇게 치히로는 이름을 빼앗깁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면, 치히로는 영영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2. 시골 소녀 미츠하가 눈을 떴을 때 맞닿은 현실은 자신이 도쿄의 타키라는 소년으로 몸이 바뀌어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움을 한켠으로 밀어내며 꿈이겠거니 기껏 마음을 다스리지만, 점점 반복되는 위화감에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몸을 소중히 다뤄달라는 안부 내지 협박의 메시지를 전하지만, 갈수록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습니다. 몸이 바뀌는 덕분에 역설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둘은 서로를 애타게 찾습니다. 시간을 돌고 돌아 그리움의 끝 무렵 만났을 때, 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첫 이름은 내가 짓지 않음이 보통이므로 세상으로부터 처음 부여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름이란 세상과 나를 잇는 첫 연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자아를 되찾고 정체성을 유지하는 열쇠로, <너의 이름은>에서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는 단서로,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도 ‘이름’이 가진 중요한 의미를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어떤 이의 이름은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중요한 부름말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소중한 의미가 되는 계기로 ‘이름’을 듭니다. 사람의 의미가 이름으로 응축되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 의미가 발산되는 장면을 시인은 포착한 것이 아닐까요. 시인은 그저 몸짓이 꽃으로 피는 데 필요한 토양은 이름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름이 중요하다 보니 반대로 쉬이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임금의 이름을 피하는 피휘(避諱) 제도야 예외적이라 하더라도, 옛 사람들은 자(字)나 호(號)를 지어 본명을 아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삼국지의 유비를 유현덕, 관우를 관운장, 장비를 장익덕으로도 알고, 정약용을 다산, 이이를 율곡, 이황을 퇴계, 김정희를 추사로도 부르는 데 익숙한 이유는 바로 이들의 자(字)나 호(號)가 이름 대신 편하게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명을 부르는 방향이든, 본명을 아끼는 방향이든, 이름이 가지는 묵직한 무게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첫 이름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부여받는 것이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김치국’, ‘구태놈’, ‘김방구’, ‘박시알’... 이런 식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습니다. 대법원이 발간한 <역사 속의 사법부>에는 이처럼 뜻도 알기 어렵고 자칫 오해할 수 있는 이름들이 개명허가를 신청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참다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이름을 찾는 방편이 바로 개명(改名)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파산선고를 받고 면책 결정을 받았는데 자신의 이름이 ‘흔하고 개성이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느낌’이라는 이유로 개명허가를 신청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이름이 바뀔 경우 혹시 파산선고에 따른 법령상 제한을 회피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니 개명에는 좀 신중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대법원은 ‘이름’의 의미와 ‘개명’의 기준을 세우는 판결을 한 바 있습니다(대법원 2009스90 결정). “사람이 자신에 대한 칭호로 어떠한 이름을 사용할 것인가는 기본적으로 각자의 기호에 좇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이름은 사회적으로는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식별하여 특정하는 기능을 가지나, 동시에 각 개인으로 보면 그것은 인격존중의 기반으로서 외부에 대하여 자신을 나타내는 표징이므로, 각자가 이를 자유로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인격권의 당연한 내용이다.”

그리고 “개명신청을 하는 사람이 신청이유로 제시하는 바가 개인적인 평가 또는 판단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시적·즉흥적인 착상이 아니고 신중한 선택에 기하였다고 판단되는 한 그것이 그 자체로 현저히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 이를 개명의 상당한 이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 다만 “개명은 범죄를 기도 또는 은폐하거나 법령에 따른 각종 제한을 회피하거나 부정한 금전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개입되는 등으로 개명신청권의 남용으로 볼 수 있는 경우에는 이를 허용하여서는 안 된다.”하여 개명의 한계를 짓지만, 앞서 든 사례는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개명을 허가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 이름, 프랑스어 이름을 지어본 경험이 생각납니다.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의미가 있으면서도, 불리기는 쉬운...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스스로 짓는 이름은 내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이 나를 이렇게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이 더욱 깊었는지 모릅니다. 대법원이 말하듯 이름이란 과연 ‘인격존중의 기반으로서 외부에 대하여 자신을 나타내는 표징’이 아닌가, 그렇기에 이름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새삼 되새겨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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