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대망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태바
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6-대망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 손호영
  • 승인 2021.04.16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역사를 이야기로 만날 때, 의미나 재미가 배가 되더군요. 건조한 사서(史書) 몇 줄에 살을 덧붙이면, 흙먼지 자욱하고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장면들이 드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삼국지 정사보다 삼국지 연의가 더 친숙하고 정이 가는 이유, 송나라 정사보다 수호전이 더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의 힘 덕분입니다.

어린 시절 삼국지 연의, 수호전을 한참 읽고 나서, 다음 역사소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삼국지 연의나 수호전처럼 긴 호흡으로 한 시대를 조명하는 이야기를 갈급했습니다. 그때 마침 아버지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이 눈에 뜨였습니다. 제법 두꺼워 마음에 들었는데, 책 제목의 위엄이 상당했습니다. ‘대망(大望)’ 큰 꿈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거대하길래, 하며 펼쳐들었습니다.

‘대망’은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입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요 인물로 삼아 각 인물에 캐릭터성을 부여한 뒤(다른 말로 하면, 미화한 뒤), 이야기를 빚어나갔습니다. 삼국지 연의나 수호전과 같이 고대를 다루던 소설과는 다르게 신기했던 점은, 상인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고 교역이나 상거래의 역할을 자못 강조했다는 것과 새로운 기술의 습득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대망을 통해, 일본이 남-북보다는 동-서로 구분한다는 것을, 일본식 이름은 성 2글자, 이름 2글자 합계 4글자의 한자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을 처음 알았으니, 일본에 대하여 처음 접한 역사소설로서 꽤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망을 다시 보게 된 때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입니다.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책을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내용이 옛날의 대망이었습니다. 옛 추억에 반가워 몇 페이지를 넘겨 보았는데, 판형도 다르고 번역투도 좀 달랐습니다. 옛 대망에 익숙했던 저로서는 차라리 예전 대망이 그리워졌습니다. 세련되게 단장한 모습이 오히려 낯설었달까요. 놀라웠던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을 다시 찾은 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옆에 꽂힌 ‘대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옛 대망도 새롭게 손질되어 재출간된 듯 했습니다. 번역계의 클래식과 뉴에이지의 대결인가, 둘은 어떤 관계지, 궁금하면서도 흥미로웠는데 그게 분쟁의 시작이었던 모양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판)’는 야마오카 소하치가 1950년부터 1967년까지 집필하여 고단샤(講談社)를 통해 출간한 소설입니다. 대망은 A출판사가 1975년부터 고단샤의 책을 번역하여 판매를 시작한 책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한국어판)는 B출판사가 1999년 고단샤와 계약을 체결 후 정식 번역하여 출간한 책입니다. 문제는 A출판사가 2005년에 이르러 1975년판의 내용을 일부 수정하면서 발생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1995년 개정 저작권법(5015호)은 시행 이전에 발행된 외국 저작물이더라도 시간을 거슬러(소급하여) 보호를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판)는 위 법에 따라 보호되는 회복저작물입니다. 회복저작물을 원저작물로 하는 2차적 저작물로서 1995. 1. 1. 전에 작성된 것은 법 시행 후에도 계속하여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1995년 개정 저작권법 시행 이전에 회복저작물을 적법하게 이용하여 온 사람의 신뢰를 보호하고 그 동안 들인 노력과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A출판사의 1975년판 대망은 위 법에 따른 2차적저작물로서 여전히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쟁점은 2005년판 대망의 성격입니다. 1975년판과 동일하다고 할 것이면 2차적저작물의 적법한 이용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고,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면 2005년판은 새로운 저작물에 해당하여 위 법에 따라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B출판사는 후자라고 주장하며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 A출판사와 대표는 저작권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습니다.

1심과 2심은 1975년판 대망과 2005년판 대망이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하여 모두 유죄를 선고했지만, 3심은 달랐습니다. 단순히 양 저작물을 대비할 것이 아니라 1975년판의 창작적 표현이 2005년판에도 포함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면서, 2005년판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판)의 표현을 그대로 직역하지 않고, ‘어휘와 구문의 선택 및 배열, 문장의 장단, 문체, 등장인물의 어투, 어조 및 어감의 조절 등에서 표현방식의 선택을 통한 창작적 노력’이 여전히 보이는 점을 고려해볼 때, 2005년판 대망은 1975년판 대망을 실질적으로 유사한 범위에서 이용하였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2005년판은 1975년판과의 관계에서 2차적저작물의 이용행위에 포함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대법원 2020도6425 판결).

추억의 대상이었던 대망이 이런 송사(訟事)에 얽힌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 시절 소비자나 독자로서 별다른 의식 없이 책을 읽었는데, 법률가가 되고 보니 이제야 공부할 만한 이슈가 있었음도 발견하고,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저작권이란 무엇인지, 저작권을 보호하는 체계는 어떻게 이루어져있는지, 그 보호 기준은 어떻게 되는지, 대망에 단순히 추억이 아니라 생각거리도 하나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