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4-진실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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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4-진실의 재구성
  • 손호영
  • 승인 2021.04.0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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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손호영</strong>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관타나모 베이 미국 해군기지에 근무 중인 산티아고는 도무지 군에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관상동맥에 문제가 있었던 탓에, 훈련 중 걸핏하면 낙오하기 일쑤입니다. 한계에 다다른 산티아고는 전출을 요청하지만 묵살됩니다. 곧 산티아고가 다시 실수를 하자, 사령관은 소대장에게 산티아고에 대한 코드 레드(Code Red)를 명령합니다.

코드 레드-손발을 테이프로 묶고, 천으로 재갈을 물린 뒤 머리카락을 깎는 등의 방법으로 괴롭히는 것을 의미하는 코드 레드는 기지 내에서는 불문율입니다. 문제는 산티아고가 소대장의 명령을 받은 도슨과 다우니의 코드 레드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슨과 다우니는 기소되었고, 사령관과 소대장은 코드 레드를 명령한 것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산티아고를 보호해왔고, 결국 산티아고를 전출시키기로 했는데, 도슨과 다우니가 마음대로 천에 독을 묻히는 바람에 산티아고가 사망했다며, 산티아고의 사인을 독살이라 주장합니다.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 생각하는 도슨과 다우니는 억울합니다. 그들을 변호할 군법무관 캐피는 첫 만남에서부터, 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적게 받자는 말을 대뜸 합니다. 현실적인 선택을 하자 합니다. 도슨과 다우니는 일언지하 거절합니다. 캐피는 당황하지만 고민 끝에 이들을 이해하고,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습니다.

〈어퓨굿맨〉은 군에서 일어난 가혹행위 사건을 다루면서, 진실을 밝히는 수단으로 법정을 선택한 영화입니다. 법률가로서 〈어퓨굿맨〉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역시 캐피의 신들린 듯한 증인신문입니다. 군검사의 신문에 대해 물 흐르는 듯 대응하는 캐피의 증인신문은, 법정공방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군검사는 산티아고가 독살되었다며 그의 사망을 진단한 군의관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군의관은 독이 검출되지는 않았으나 검출되지 않는 독도 많다며, 평소 건강했던 산티아고에게 산독증(acidosis)이 발생한 것은 독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산티아고의 사인은 독살이라 추정합니다. 이제 캐피의 반대신문 차례입니다. 신중히 묻는 캐피. “산독증이 빨리 진행될 수 있는 몸 상태가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혹시 관상동맥 문제(coronary disorder)가 있으면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관상동맥에 문제가 있으면 몸에는 어떤 증상이 나타납니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슴 통증? 숨가쁨? 피로?” 그렇습니다. 그러자 캐피가 군의관이 평소 산티아고를 진단한 차트를 제시합니다. “증인께서 산티아고에 대해 진단하신 부분을 읽어주시죠.” 건강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통증이 발견된다. 가슴통증, 숨가쁨, 피로...

캐피는 독살이 아닐 수 있음을 자신의 입이 아닌 증인의 입을 빌려 진술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군의관이 평소 산티아고에게서 가슴통증, 숨가쁨, 피로를 발견했음을 밝히고, 그것으로 산티아고의 관상동맥에 문제가 있음을 추정하게 한 뒤, 배심원들로 하여금 독이 아닌 관상동맥의 문제로 인하여 산티아고에게 산독증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세련되고 정교한 질문 순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 캐피는 동료 부대원을 증인으로 불러 코드 레드가 있음을 확인받습니다. 그러자 군검사가 코드 레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자 증인에게 부대 안내와 정보 책자를 건네며 묻습니다. “여기 어디에 코드 레드가 쓰여 있습니까?”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캐피가 군검사의 책자를 빼앗아 들고 부대원에게 묻습니다. “여기 식당이 어디 있는지 쓰여 있습니까?”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죠?”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식당의 위치가 책자에 쓰여 있지 않다고 존재를 부인할 수 없듯, 코드 레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캐피는 군검사의 공격 논리를 방어 논리로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논리의 허점을 절묘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캐피는 마지막으로 사령관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무시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령관의 속을 긁어 내기로 합니다. “증인은 산티아고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히 소대장에게 명령했습니까?” 그래. “소대장이 증인의 명령을 어길 가능성은 없습니까? 늙은이는 틀렸어-이러면서?” 내 명령을 소대장이 어긴다고? 이봐, 전방에서 근무한 적이 있나? 우리는 명령을 반드시 따라. “그러면 증인의 명령으로 산티아고는 안전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증인은 왜 산티아고를 전출을 시키려고 했던 것입니까? 혹시 증인의 명령은 무가치한 것 아니었습니까?” 뭐라고?! “묻겠습니다! 당신이 코드 레드를 지시했지요?” 그래! 젠장, 내가 그랬다!

사령관은 부하가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상황, 나아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꾸몄듯, 산티아고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했다면 산티아고는 안전했어야 했고 그랬다면 산티아고는 전출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령관은 산티아고를 괴롭힘 때문에 전출시키려고 했다는 거짓말을 덧붙여 놓은 상태입니다. 그러다 보니 산티아고가 전출되는 상황은 사령관의 명령이 무시된 듯한 인상을 보여줍니다. 자가당착에 빠진 사령관은 그 상황이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의 코드 레드 명령으로 산티아고가 괴롭혀진 것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가져올 폭풍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그 날의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는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의 영역입니다. 증명되지 않는다고 하여 진실이 부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3자가 진실을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법정은 진실의 그림자인 ’사실‘을 드러내 인정하고 이를 통해 진실을 재구성하려 합니다. 캐피의 변호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건을 완전히 파악한 채, 세밀하면서 과감하게 진실을 재구성하는 데 탁월함을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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