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1-오해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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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1-오해불식
  • 손호영
  • 승인 2021.03.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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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1 노인이 아스라이 오랜 기억을 되살려봅니다. 동네 꼬마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주기로 합니다. 옛날에 어떤 남자가 한 여인을 참으로 사랑했단다. 애오라지 용기를 내어 어렵게 청혼을 했지.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 “두 마리의 말과 다섯 마리의 소를 가지고 오면 결혼하겠어요.” 남자는 여인에 어울릴 수 있도록 골똘히 일했지만 쉽지는 않았지. 결국, 시간이 지나 남자는 여인에게 다시 다가서지 못하고 말았단다. 안타까운 이야기 아니니? 동의를 구하는 노인의 얼굴에는 그리움과 아쉬움, 자책이 복잡하게 서려 있었습니다. 그때 한 꼬마가 갸우뚱하며 노인에게 반문했습니다. “할아버지, 두 마리 말이랑 다섯 마리 소면, ‘두말 말고 오소’라는 뜻 아니에요?”

#2 딸이 결혼식을 앞두자 어머니는 간직해 온 자신의 드레스를 꺼냅니다. 긴 시간 연인이었던 남자로부터 받은 드레스입니다. 어머니는 남자에게 결혼을 이야기하며 남자에게 수줍게 이야기했던 때를 기억해냅니다. 우리 둘이 결혼할 때 나는 긴 드레스를 입었으면 해. 기다려봐, 내가 잘 만들어서 줄게. 설렘 가득히 받아든 드레스는 예상과는 달리 짧은 드레스였습니다. 크게 실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남자에게 헤어짐을 고합니다. 드레스조차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어? 이제 세월이 흘러 자신보다 조금 키가 작은 딸이 결혼식을 앞두고 마침 그때 드레스가 떠올라 딸에게 넘겨줍니다. 딸은 드레스를 보며 이쁘다 난리입니다. 그리고 드레스를 입고, 한 바퀴 도는데, 휘리릭하며 드레스가 풀리며 숨겨진 긴 자락이 완연히 드러납니다.

말하는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은 다른 사람입니다. 말하는 바와 듣는 바가 일치할 때 우리는 이해했다 하고, 불일치하면 오해했다 합니다. 젊은 시절 절절한 사랑을 추억하는 남자와 여자는 애꿎게 상대방을 탓했습니다. 두 마리 말과 다섯 마리 소를 구하기 위해 백방 애썼던 남자는 언젠가는 여자를 원망했을지 모릅니다. 지나치게 어려운 조건이 아닌가. 당신은 속물이야. 기대와 다른 짧은 드레스를 받은 여자는 남자가 못마땅했을지 모릅니다. 고작 드레스에 대해서까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당신과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 그러나 정작 상대방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은 자신입니다. 이제 와서 성급히 결론지었던 스스로를 한탄해봐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절절히 사랑했던 사이가 이럴진대, 생판 남들이 만나 이야기할 때는 오죽할까요. 갑(甲)과 을(乙)이 만나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여 합치된 내용을 함께 적어 내려가는 계약서를 작성했음에도, 그 계약서의 문구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사소통이란 이처럼 어렵고 고된 일입니다.

을이 갑으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갑에게 계약서에 “차용금에 대한 이자는 연 4%로 하고 만기 일시 상환한다. 단, 만기일에 상환이 지체될 경우 연 20%의 이자를 적용한다.”고 적어 주었습니다. 을이 돈을 못 갚게 되자, 갑은 을에게 소송을 겁니다. 그리고 요구합니다. 차용금과 차용일부터 연 20% 이자를. 을은 펄쩍 뜁니다. 차용일부터 연 20%라니, 말도 안 된다. 본래 돈을 갚기로 한 만기일 이후부터 연 20%를 지급하면 될 뿐이다. 분명 갑과 을은 서로 상의하여 위 조항을 작성하였는데, 차용일부터 연 20% 이자가 붙는 것인지, 만기일 이후 연 20% 지연손해금을 지급하여야 하는지, 다툼이 생겼습니다. 말하는 바와 들은 바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같은 문구로 서로의 의사를 정리했다지만, 각자의 오해로 작성된 문구입니다.

판례는 이 상황에 대해서 ‘계약당사자 사이에 어떠한 계약 내용을 처분문서인 서면으로 작성한 경우에 문언의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문언대로 의사표시의 존재와 내용을 인정하여야 한다.’면서도, ‘당사자 일방이 주장하는 계약의 내용이 상대방에게 중대한 책임을 부과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문언의 내용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사안을 풀이합니다. 그리고 계약서에 단순히 ‘이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대여금 상환의무 불이행으로 지급의무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 성질은 지연손해금으로서의 손해배상금이지 이자는 아니라고 할 것이라면서, 을의 손을 들어줍니다(대법원 2019다279474 판결).

갑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을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 사용한 문구는, 갑의 숨은 내심은 을로부터 ‘차용일부터 연 20% 이자’를 받기 위함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을도 마찬가지입니다. 을로서는 그러한 부담을 질 우려가 있었다면 갑으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함은 향후 분쟁이 없도록 미리 서로 생각하는 바를 논의하며 섬세하게 정리하는 것임에도 이러한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쟁을 줄일 수 있는 방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오해를 줄이는 것, 서로의 생각하는 바를 되도록 일치시키는 것. 두 마리 말과 다섯 마리 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는 작은 용기, 짧은 드레스를 선물받았을 때 조심스레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신중함.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것.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있었다면 남자와 여자가 회한에 잠길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갑과 을도 애초에 계약서상 ‘이자’가 무엇인지 분명히 하려 했던 차분함과 진중함이 있었다면 대법원까지 소송을 계속하지 않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나의 생각에 매몰되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를 파악하고,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 것, 그렇게 되면 분쟁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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