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0-법의 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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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0-법의 함수
  • 손호영
  • 승인 2021.03.0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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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덴마크 왕이 독사에 물려 서거한 뒤 그 동생이 보위에 오릅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승하한 왕의 유령이 궁궐을 배회하던 것은. 왕자가 맞닥뜨린 유령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의 동생, 그러니까 왕자의 숙부가 자신의 귀에 독을 넣었다고. 복수해달라고. 왕자는 유령에게 복수를 다짐합니다. 스스로 광인(狂人)인 척 꾸미고 사랑하는 연인을 밀어내며 기회를 엿보던 왕자는 그러나 고뇌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이내 왕을 찔러 복수를 해내지만, 자신의 연인, 그의 오빠, 그들의 부친,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이야기를 문학의 함수, 철학의 함수, 심리학의 함수에 대입해보면 그 결과값은 잔뜩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유령을 만나 다짐하게 된 복수심에,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에 대한 애증, 연인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 등을 더하여, 마음이 복잡한 덴마크 왕자 햄릿은 그 때문에 정서가 한껏 불안하며 정돈되지 않습니다. 토로하는 심정은 흔들리고, 그래서 더욱 격정적입니다. 덕분에 햄릿은 한마디로 요약되지 않고, 문학, 철학, 심리학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됩니다.

한편 햄릿을 법의 함수에 대입시켜보면, 결과값은 확장되기보다 수축됩니다. 햄릿의 행위 중 법이 관심 있을 만한 내용은 ‘햄릿의 복수행위’일 뿐입니다. 숙부가 아버지를 독살했다든지,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을 만났다든지, 숙부가 어머니와 재혼했다든지 등의 이야기 조각은 햄릿이 복수행위에 다가서게 된 ‘동기’에 그칩니다. 서사가 쌓아 올린 햄릿이 행한 복수의 정당성은 법의 함수에서는 변죽에 불과합니다. 법의 함수를 통해 추려진 의미 있는 햄릿의 행위는 그저 ‘햄릿이 숙부를 칼로 찔렀다.’입니다.

삶을 살아갈 때 배경과 맥락이 중요함은 물론입니다. 햄릿을 향한 ‘오죽했으면’이라는 동정과 ‘그럴만했다.’라는 공감은 우리 인간성의 발로이고 따라서 자연스럽습니다. 햄릿이 드러내는 비극성은 보편적으로 깊이 받아들일 수 있기에, 햄릿 이야기는 지금까지 강한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법은 이를 주된 것이 아닌 부수된 것으로 보고, 참고삼을 뿐입니다. 상식과 법이 괴리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의 함수를 적용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법률가의 역할 중 중요한 부분 하나는 일상의 흩어진 사실을 법의 함수에 맞추어 요연히 정리한 뒤 쟁점을 가려내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햄릿을 당사자로 만났을 때, 햄릿이 피력하고자 하는 바와 법률가가 챙기고자 하는 내용이 서로 다를 수 있으므로 당사자(햄릿)로서는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법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햄릿이 장황히 펼쳐내는 동기와 밝히는 행위 중에서 무엇이 법의 함수에 있어 의미가 있을지 분별하는 것이 법률가의 책무입니다.

다만 법률가로서도 당사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처음 모아낼 때는 수집 잣대를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법이 요구하는 ‘구성요건 해당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어, 그 사실의 존부를 헤아려야 할 때, 당사자가 알려주는 이야기에서 단서를 찾아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로 고의와 같은 범죄구성요건의 주관적 요소에서 문제됩니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범죄구성요건의 주관적 요소인 고의를 부인하는 경우, 그 범의 자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므로 사물의 성질상 범의와 관련성이 있는 간접사실 또는 정황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이를 증명할 수밖에 없다. 이때 무엇이 관련성이 있는 간접사실 또는 정황사실에 해당하는지는 정상적인 경험칙에 바탕을 두고 치밀한 관찰력이나 분석력으로 사실의 연결상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방법에 의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16도15470 판결).”고 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병역법 위반 사건에서 피고인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양심을 직접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므로 사물의 성질상 양심과 관련성이 있는 간접사실 또는 정황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판단(대법원 2020도8055 판결),”하여야 하는데, 대법원은, 피고인이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기는 하나, 종교활동을 중단한 지 9년간 활동하지 않았던 점, 종래 추후 입영예정임을 전제로 입영연기를 신청하였을 뿐 병역거부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하지는 않았던 점, 입영 바로 전날 입영을 거부하게 된 점, 여러 전과가 있었던 점 등을 근거로, 병역거부 당시 피고인의 종교적 신념이 깊거나 확고하다고 볼 수 없고,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보기 어렵다고 한 바 있습니다.

결국 법률가라면 응당 법의 함수에 능숙하여, 이를 기준으로 사실을 정제하여야 함이 첫째 역할이라고 할 것이고, 법의 함수라는 것에 매몰되지 않고 당사자의 말에 주목하며 단서를 수집하여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야 함이 둘째 덕목이라고 할 것입니다. 법률가의 역할과 덕목이 합리적으로 활용될 때, 올바른 판단이 가능할 것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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