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보는 재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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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는 재판 이야기
  • 김상준
  • 승인 2006.08.25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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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부장판사·서울행정법원

 

“변론 시작하기에 앞서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새벽 꿈에 재판장님이 나오셨습니다. 프레젠테이션만은 면해 달라고 간청하다 잠이 깼습니다.”


원고 대리인인 A 변호사는 이렇게 첫 말문을 열었다. 이 조크에 긴장된 법정 분위기가 일순간에 풀어졌다. 변론준비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주장도 되리라. A 변호사는 솜씨 좋게 자신의 주장을 풀어나갔다. 20분간에 걸친 그의 강연은 흥미진진했다. 피고 대리인의 변론이 이어졌다. 이어 질의응답 시간. 몰라서 묻는 질문. 알고도 묻는 질문.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고 말을 들으려면 질문도 예리해야 된다. 그래서 예습도 해 오고, 수업도 충실히 듣는 것이다. 이제 법정에서 펼쳐진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더불어 사건에 관한 생생한 그림이 떠오른다. 어려운 사건이다. 사안의 본질을 파고들어 결론에 이르기에는 앞으로도 꽤나 정신노동이 필요하겠다. 그러나 사건의 고민거리를 공감한다는 일. 그것은 외로운 사건기록 읽기만으로는 어림없는 것이다. 법정에 모여 말로 하고 듣고 보는 재판이 주는 즐거움이다.


원고 병원이 한 척추수술이 과잉진료였는지가 문제로 된 사건이 있었다. 척추전방전위증, 척추관협착증, 척추후궁절제술, 골편절채술, 척추간융합술, 넛슨현상, 척추경나사못, 로드…….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준비서면을 읽다가 기록을 덮어버렸다. 자기들끼리 해결할 일이지.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재판을……. 험난한 앞길에 탄식이 나왔다. 판결을 써야 할 주심판사의 처지도 안쓰럽다. 난감하기는 원·피고 대리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전문의를 어렵사리 각자 법정에 대동하고 나왔다. 이제 우리 법정에는 척추수술에 관한 작은 의학교실이 열린 셈이다. 척추 모형, 시술도구 등은 물론이고, 척추구조도, 환자의 방사선 사진, 척추강 조영술 사진과 같은 이런저런 영상자료도 동원되었다. 의료정책적 입장에서 우리나라 척추수술과 관련된 문제를 놓고 피고측 전문의의 강연도 이어졌다. 네 시간에 걸쳐 허리뼈 이야기만 듣다 보니 내 허리도 점점 뻐근해져 왔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짙게 드리워진 장막이 거두어지고 사건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배석판사들도 중간 중간에 질문을 자주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사건의 무게를 덜어가는 개운함이 있었다. 이런 과정 없이 결론을 내렸더라면…….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법정(courtroom)은 일종의 classroom이다. 거기에 사건과 관련된 정보가 집중될 것이다. 그 정보의 교환, 커뮤니케이션 과정이 재판이다. 효율적인 정보의 전달, 설득과 교육을 위해서는 좋은 교재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고 이어서 강의도 훌륭하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런 저런 교보재를 활용하여 요점정리를 잘 해 주면 판결문이라는 논술답안지를 적어 낼 학생이 오답을 낼 확률을 줄여 줄 것이다.


그래서 B 변호사가 갑자기 양복 안주머니에서 메모리 스틱을 꺼낸 것이다.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도표로 정리한 자료를 보여 드리면서 변론을 할까 합니다.” 잠시 후 원고별 근무기간, 퇴직금 수령액, 부족액, 평균임금 등이 엑셀파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화면이 대형스크린에 떴다. 스무 장짜리 소장을 읽는 것보다 단 10분의 설명으로 쟁점을 이해하는 데 충분했다. 이런 재판이 요즈음 심심찮게 진행되고 있다. 시간과 싸움을 하는 재판부로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구술재판이 늘면서 법정의 풍경도 바뀌고 있다. 안 하던 일을 새로이 하는 것이기에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흔쾌히 헌신적으로 동참하여 주신 변호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에 이르렀다. 변론자료를 만드느라 전에 없었던 품을 더 드렸을 것이다. 변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으리라. 변론기일변경도 아니고 ‘변론시간변경신청서’라는 신종 신청서류를 받아 들 때마다 마음이 저며 온다. 이런 서류를 만들어 낼 때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였을까. 허나 이 모든 노고가 바탕이 되어 재판이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충실한 변론을 해 주는 변호사들의 전문가적 성실함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재판부의 소감이 그러할진대, 법정에서 방청을 하고 있는 의뢰인들은 또 어떻게 느낄까. 오로지 법정에서만 모든 것을 투명하게 다 드러내기로 한 이런 재판에 ‘신뢰의 회복’이라는 미래 희망의 씨앗이 있다고 믿는다.


좋은 재판은 훌륭한 협주곡 공연과 흡사한 면이 있다. 성공적인 협연에 주연으로서 소임을 다 하고 계신 변호사님들께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커튼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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