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세련된, 너무나 세련된 부탁
상태바
[칼럼] 세련된, 너무나 세련된 부탁
  • 송기춘
  • 승인 2021.02.25 18: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래 전 변호사인 친구가 사건에 관한 청탁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는 통화하는 상대방에게 사건번호와 당사자의 이름을 말하고 ‘기록 좀 잘 읽어봐 달라’는 말을 하였다. 내겐 그러한 부탁의 방식이 좀 생소했다. 기록이나 좀 잘 읽어 봐 달라니...... 그러나 생각할수록 참 세련(?)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록‘이나’ 잘 읽어봐 달라는 것이니 사건에 관하여 직접 특정한 결론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기록을 객관적으로 꼼꼼히 읽어봐 달라는 것이니 정의로운 해결을 구한 것일 뿐 공정을 해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다.

특정한 사건에 관하여 돈을 주고 특정한 사건의 결론을 주문하는 행위는 뇌물죄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수(下手)다. 돈을 주고받지 않아도 ‘척하면 삼천리’인 인간관계를 만들어 두는 것이 상수(上手)다. 그렇게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여 촘촘한 인간관계의 그물망을 이루면 법망은 오히려 허술해진다. 그들 사이에는 돈을 주고받는 것마저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금전대차관계라고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퇴직한 직장 선배와 현직 후배 사이에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어 퇴직한 이들이 현직과 관련하여 하는 사업이 성황을 이루고 큰 돈을 벌게 되면, 현직 또한 퇴직 후 그러한 이익을 누릴 기대를 갖게 된다. 서로 돈을 주고받지 않고도 큰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른바 전관예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은밀하게 사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이니 잘 드러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드러난다고 해도 그저 ‘기록이나 잘 읽어봐 달라’고 했을 뿐이니 사건에 관하여 어떠한 요구를 한 적도 없다고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관예우라는 것도 범죄의 틀에 포섭하기 쉽지 않다. 사실 전관이 어떠한 부탁을 전혀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사건을 수임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현직이 알기만 하면 그만이다. 초임 법관 시절에 ‘모셨던’ 부장판사나 사법연수원 지도교수나 자기에게 승진의 기회를 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래서 전관예우는 없다. 그러나 그게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현직이 전관의 수임 사건에 대해 우호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전관은 이익을 누리고 있고 현직도 앞으로 그러한 이익을 누릴 것이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관이 현직에 대해 아무런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면 담당 사건에서 전관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하여 그것만으로 어떤 범죄행위가 있었으리라 추측하는 것도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전관의 개업 장소나 시기를 규제하고, 현직의 전관과의 만남이나 연락 자체를 제한하거나 보고하게 하는 방안이 등장한다.

‘권고와 조언’이라는 세련된 행위도 같다. 최근 법관 임성근이 탄핵소추된 사안과 관련하여 법원은 임판사의 재판개입 행위가 직권남용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임판사가 형사수석부장판사라고 해도 그가 재판의 진행이나 결과에 관하여 남용할 권한이라는 게 없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한이 있다고 해도 재판에 관한 임판사의 행위가 담당 법관에 대한 권고 또는 조언 정도에 불과하여 재판의 진행이나 결과와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세련된’ 권고와 조언이다. 하지만 곧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앞둔 판사의 인사평정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수석부장판사가 그에게 판결을 어떻게 해 달라고 하는 말이 단순한 조언이나 권고일 수 있겠는가? 참으로 법문의 개념에 충실한 해석은 결국 모순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수만 걸리고 상수는 걸리지 않는다. 하는 부탁이 터무니없을수록 직권남용죄에 해당할 가능성은 적어진다. 터무니없는 부탁을 할 권한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록이나 읽어봐 달라는 부탁의 방식은 법을 알기에 가능하다.

법원이 임성근 판사의 직권남용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여러 차례 그것이 ‘위헌’인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법원으로서도 죄형법정주의 때문에 법적용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고 헌법적 징벌(탄핵)을 하는 게 옳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