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수험생을 위한 칼럼(127):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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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수험생을 위한 칼럼(127):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
  • 정명재
  • 승인 2021.02.2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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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재 정명재닷컴
(정명재 공무원 수험전략 연구소, 공무원시험 합격 9관왕 강사)

스스로 그린 그림을 자화상(自畵像)이라 한다. 우리는 이 시간에 어떤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까? 자화상을 마흔 세 장이나 그린 빈센트 반 고흐, 화려했던 젊은 시절부터 인생 말년의 늙은 자화상을 63세의 죽음 직전까지 남겼던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조선시대에는 윤두서의 자화상이 걸작이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였다. 담채화로 그린 그의 자화상은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염이 가득한 중년의 모습에는 눈빛의 강렬함이 특징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강한 기개와 정신도 엿볼 수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초년기에는 혈기 왕성하고 자신감에 찬 모습이다. 중년의 자화상은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은 성공적인 화가 자신을 담았다. 그리고 부인과 자식을 잃고 홀로 남은 고독한 모습을 말년에는 담담하게 남겼다. 그는 늙고 주름진 얼굴과 이가 빠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보며 실물을 대하며 자신을 그렸다. 꾸미지 않은 현실을 그대로 그리며 그는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그림을 그려 나갔을까 생각해 본다. 고흐는 왜 그토록 많은 자화상을 그렸는지 평론가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 놓는다. 당시에는 이름을 알리지 못한 무명(無名)의 화가로 지독한 가난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그보다는 외부와 단절된 삶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고흐는 사회적 소통에는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감정을 섬세한 붓의 터치로 표현하는 표현주의 선구자로 남았다.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이던 자신의 불안한 상태를 물결치는 배경과 대비시켜 극명하게 표현했고, 귀가 잘린 자화상에서는 그의 불안한 내면을 표현했다.

얼마 전, 누군가의 자살 이야기를 뉴스에서 접했다. 대한민국, 자살률이 OECD 36개 회원국가 중 1위, 행복지수는 3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23위로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수치로 우리나라를 한 마디로 진단하긴 힘들지만 마음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사회적 환경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40분에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다.

경제적 환경을 비관하여 자살을 선택한다면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으로 갈수록 자살의 빈도는 높아져야 한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경제 강국 10위’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자살률이 높다. 1997년 외환위기, 2002년 카드 대란,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수직상승한 곡선은 꺾일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청소년층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자살 원인 통계치를 보면, 정신적 문제가 가장 높고 다음이 경제적, 신체적 질병으로 이어진다. 정신적 문제로 인한 고통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 가장 빈번한 것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자살은 낯선 단어였다. 가난한 시기였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처지에서 서로의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고 하루의 피로를 위로해 줄 마음의 여유가 있던 시간이었다. 신문을 함께 보고, 텔레비전 편성표를 기다리며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둘러앉은 식구들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거리에 있었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일도 지루하지 않았고, 놀이터에서 단순하기 그지없는 놀이에도 신나서 깔깔대곤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손에는 핸드폰이 주어졌다. 지하철 그리고 버스의 옆자리, 가족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게임과 채팅에 손은 분주하기만 하고 정신은 온통 핸드폰 속으로 들어간다. 누구도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는다. 개인주의의 향연(饗宴),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는 누군가를 아무 생각 없이 비난하고, 욕설을 뱉어내고, 정신적 폭력을 아무 수고 없이 행사한다. 단지 손가락 몇 개의 힘을 빌려, 익명(匿名)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약한 처지를 보상 받듯이 내면의 필터장치를 거치지 않은 채 악다구니를 신나게 발산한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는 상처를 입고,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점점 쇠약하고 슬픈 자화상을 담담히 그리고 있었다.

수험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일이 종종 있다. 자신감이 떨어진 수험생, 불합격으로 마주해야 하는 초조함과 불안 등이 만연한 일상에서 탈출구를 찾는 모습이다. 누군가의 위로는 바라지 않더라도 비난하고 비난받는 일에 극도로 예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황폐함은 더해져 스스로 괴물처럼 변한 채, 손에는 누군가를 향해 던지는 댓글이라는 무기가 들려 있고, 익명의 공간에서 행사하는 힘은 권력이 된 지 오래다. 그 누군가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고, 언젠가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될 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들어 댄다. 왜냐하면 비난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무례(無禮) 행동’의 용수철 효과라는 것이 있다. Anderson과 Pearson(1990)에 따르면 무례행동은 생각 없는 행동이나 거친 말투에서 시작되고 약한 일탈행동이지만, 강도가 약하더라고 계속 반복적으로 행사하면 강한 영향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상대방의 전후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약하고 한심한 존재로 상대를 비난하고 매도하기도 한다. 그가,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관심이 없다.
 

몇 해 전, 장애를 가진 수험생을 도운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고 그들 돕기로 마음먹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나 역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가 하는 은밀한 행위를 알게 되었다. 현실의 고통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밤늦도록 공부를 하는 게 아닌, 사이버 폭력 수험생이었다. 새벽 시간까지 악성 댓글을 달면서 쾌감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쉼 없이 던지는 비난의 화살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방은 숨을 쉬지 못할 만큼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이후, 그는 도망치듯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 역시 잊고 지냈다. 그러다 최근 누군가의 자살 이야기에 불현 듯 그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감정의 영역에서 현대인에게 불치병처럼 남은 흔적은 고독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임에도 우리는 저마다 외로움을 호소한다. 거울이 발명되면서 자화상은 그려지기 시작했다. 핸드폰과 인터넷이 발명되면서 손 쉽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감정을 표현할 시대가 되었지만 부작용에 대한 마땅한 대비책은 미비하기만 하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 자신이 가진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일은 내적 통제 영역에 속하기에 각자의 의지와 동기(motivation)에 달렸다. 하지만 사회적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싸워야 할 대상은 보이지 않는 익명의 누군가와의 사투에 가까운 비난과 조롱 그리고 힘겨운 전투처럼 보인다. 세상을 향해 웃으면 거울은 그대의 밝고 긍정적인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을 향해 욕하고 침을 뱉으면 거울은 그대로 그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뿌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만드는 현실의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살며, 사랑하며, 배워라. 남들도 그대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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