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은 위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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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은 위대하지 않다?
  • 최용성
  • 승인 2021.02.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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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바이러스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좋아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확산된 원인 중 하나로 신흥종교집단에서 일부 교회까지 방역수칙을 무시한 행태가 지목되면서 개신교 전체에 대한 비난도 커졌다. 방역수칙은—정책적 결단의 영역이기도 하지만—기본적으로는 과학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세부적으로 이런저런 문제나 불편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개신교계 일부는 정부의 방역수칙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반발한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지켜야 할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주장도 존중받아야 한다. 반면 국민 전체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라면 종교활동의 자유도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 과학을 무시하고 매달리는 신앙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소박한 문제제기 말이다.

종교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전일성(全一性)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광신을 내세워 사람들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할까? 역사를 보면 종교가 대다수 사람들을 더 똑똑하게 만들었거나 행복하게 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종교로 말미암아 인류가 피의 역사를 걸어왔을지 모른다는 혐의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물론, 종교의 순기능도 분명했다. 유한성 속에서 절멸되어가는 존재인 사람들이 잠시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삶의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을 것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지옥에 대한 공포로 나쁜 짓하려는 충동을 멈추게도 하였을 터이니 사회정의 구현에 어느 정도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지식이 쌓이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서 그 정도 기능은 다른 수단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거나 심지어 더 효과적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 정도 효용가치는 결코 종교 자체를 정당화할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 우리가 역사와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배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종교로 인하여 생겨난 악을 결코 무시할 수 없거나, 아니면 다른 악보다 더 무시무시하였다는 진실에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학살과 억압이 이루어진 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종교집단의 수많은 비리, 권력 혹은 자본과의 유착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내놓는 변명은 비슷하다. 신의 가르침과, 잘못을 저지른 종교인은 다르다, 거룩한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잘못일 뿐이다 등등. 그러나 이건 어쩐지 정직하지 못한 태도 같다. 성경을 보더라도 광신자들의 광기에 불을 지를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구약성경에는 살육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그 문구들을 모순 없이 해석하기 위하여 많은 고충을 겪어야 했다. 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왔다고 했기 때문에 구약은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신약이니 구약이니 하는 말은 뭔가 좀 이상하게 들린다. 전지전능한 신이 왜 두 번의 모순투성이 약속을 하여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였을까? 이건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이든 다른 종교의 경전이든 경전을 모순 없는 완전무결한 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신 또는 진리를 경전 안에 가둘 수는 없다.

유일신교에 대한 비판으로는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 고전이다. 현대에 와서는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여기에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도전적 제목의 책도 있다. 그의 종교 이해는 낮은 수준이지만, 현실적인 사례를 들어 종교 특히 유일신교의 폐해를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종교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든다, 종교는 사람들을 광신에 빠지게 하고 서로 미워하고 죽이게 만든다, 종교의 긍정적인 기능을 종교 없이 더 잘해낼 수 있다, 계몽된 정신을 찾자, 종교적 신념을 탄압하거나 금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사람의 눈을 닫고 인간들을 서로 미워하게 하고 경계짓는 종교에 대하여 이성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 등등. 믿음이 이성과 지혜를 배반할 때 어떤 무시무시한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리고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지켜보고 있다. 언제나, 맹신, 타인에 대한 증오, 치우침이 불행의 시작이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로 돌아와 계몽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히친스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까닭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인본주의에도 영성(靈性)은 필요한 것. 거기에 제대로 이해되고 비판에 열려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침해하지 않으면서 사랑으로 헌신하는 종교가 기여할 가능성을 굳이 닫아둘 필요도 없다. 인간이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혀 자신만이 옳다며 맹신에 빠질 때 신은 위대하지 않지만, 신앙인들이 고통 받는 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조건 없는 사랑, 심지어 고귀한 희생을 할 때 신은 진정 위대하다.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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