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인 NYU 로스쿨에서는 다른 로스쿨에서 리서치와 작문이라는 다소 건조한 이름으로 부르는 1학년 필수 과목, 조사와 글쓰기 방법론을 로이어링(Lawyering)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강의와 설명을 통해 방법론을 배울 뿐 아니라, 여러 사례를 통해 리서치를 해서 글을 쓰고 클라이언트와 면담을 하고 변론하는 연습을 하는 수업이었다. 학업 부담이 제일 큰 1학년 때 조를 짜서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변호사 실무를 고려해서 꼼꼼하게 짠 커리큘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로이어링 수업 과정 중 하나가, 인종 차별을 이유로 공공 임대 주택에서 퇴거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나 면담을 하여 자세한 내용을 듣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중재를 준비하는 활동이었다. 조별로 질문을 준비하고 그 질문 내용에 따라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면담이 끝나고 나중에 알았지만 이 여성은 실제 클라이언트는 아니고, 수업을 위해 연기를 부탁받은 배우였다. 면담 과정에서 이 (모의) 클라이언트는 우리 조의 질문에 대해 화를 내기도 하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모의 면담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반응을 보고 나뿐만 아니고 다른 조원들도 당황했다. 면담이 끝나고, 그 (모의) 클라이언트는 면담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나를 가리키며 자신의 상황에 대해 공감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던 이야기이다. 내가 정확히 뭐라고 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눈물을 보이는 그녀에게 많이 힘들었겠다고 했던 것 같다.
연말연시에는 책을 많이 읽었다. 업무와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책, 전혀 관계가 없는 취미나 실용서, 소설 등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게 읽은 한 권이 프랑스인으로 미국 해외부패방지법(FCPA) 위반 혐의로 출장을 위해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어, 유죄를 인정한 후 가석방 결정이 있을 때까지 미국 형무소에서 복역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기술한 책이다. 읽기 전에도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놀란 것은 자신을 대리했던 로펌의 변호사의 실명을 거론해가며 뭘 잘못했는지, 어떤 부분이 섭섭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한 부분이었다. 물론 그 담당 변호사의 해명을 들은 것은 아니고, 변호사의 비밀 유지 의무 때문에 아마 해명을 할 수도 없겠지만, 필자가 어떤 부분에서 특히 섭섭했는지 하는 부분은 흥미롭기도 하고 참고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변호사의 업무에 불만이 있었으면 왜 당장 교체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급작스럽게 체포된 후 회사를 대리하는 로펌과 별도로 자신을 개인적으로 대리할 변호사들을 수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수감 중인 상황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회사를 대리하는 로펌의 추천으로 본인을 대리할 변호사들이 결정된 것이다. 필자가 처음에 특히 실망한 부분은, 자신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청천벽력 같은 체포에도 너무 덤덤한 변호사의 모습, 당장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따뜻한 위로의 말은 물론이고 자신의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방문을 마친 변호사의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고 한다.
회사 내, 회사 밖의 여러 변호사와 일하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뾰족한 정답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라면, 내가 존경하는 선배나 동료라면, 클라이언트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현했을 것 같다. 비록 공감 능력 표현이 변호사 본연의 업무는 아니지만, 클라이언트도 변호사도 인간인 만큼, 이런 인간적인 부분의 표현이 있어서 변호사와 의뢰인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존경하는 선배 변호사는 처음 형사 조사의 대상이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클라이언트 회사의 임직원을 만날 때, 클라이언트를 대리하게 되어 영광이고, 회사는 임직원으로 구성된 만큼, 임직원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상투적인 인사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 선배가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성의를 담아 전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필자가 책에서 지적한 것은, 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무조건 검찰 편을 들면서 검찰 말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 역시 변호사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조언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책을 읽으면서 전술, 전략적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 변호사들이 클라이언트와 충분히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이전 변호사들이 무조건 잘못을 인정하는 방향을 종용한 데에 불만을 가지고 로펌을 교체한 클라이언트도 있었다. 그 클라이언트와는 사실관계를 새로이 파악하고, 대응 방향을 전환한 끝에 결국 클라이언트에게는 아무 영향 없이 조사가 종결되었다. 물론 비용, 시간, 임직원들에 대한 부담을 고려하면 잘못을 인정하고 벌금을 내면 비교적 적은 변호사 비용으로 “덜 복잡하게” 문제가 해결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는 사실 관계를 바탕으로 싸우기를 선택했다. 아직도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를 설명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정말 잘못을 했다는 확신이 어느 정도 있으면 우리 회사도 그 책임을 지고 잘못을 인정하겠지만, 조사기관에서 왜곡한 사실을 마치 정확한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고, 또한 상장기업으로서 주주나 다른 회사 이해관계자들에게 하지도 않은 잘못을 인정하고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클라이언트가 변호사에게 원하는 것은 적확한 법적 자문과 이를 바탕으로 한 목적 달성이다. 하지만 변호사는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제공자이기도 하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클라이언트가 하라는 대로만 하는 것도 전문직의 역할을 감안하면 어불성설이지만, 클라이언트에게 법적 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클라이언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서비스 제공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20년 말에 받은 가장 반가웠던 이메일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도 고심하면서, 관계자 분들과 진심을 담은 대화를 해가면서 복잡한 조사를 도왔던 회사의 임원께서 도움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며 보내주신 짧은 인사였다. 2020년의 많은 문제를 다 종결하지 못하고 시작한 2021년에는 전문직으로서, 또 서비스 제공자로서 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 박준연 미국변호사는...
2002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수석 합격한 재원이다. 3년간 외무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최상위권 로스쿨인 NYU 로스쿨 JD 과정에 입학하여 2009년 NYU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Kelley Drye & Warren LLP’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로펌 중의 하나인 ‘Latham & Watkins’ 로펌의 도쿄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필자 이메일: jun.park@l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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