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6-사례로서의 판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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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6-사례로서의 판례
  • 손호영
  • 승인 2021.01.2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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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과학을 알기 쉽게, 독특한 소품으로 3분 동안 발표하는 경연 대회가 있습니다. 페임랩(FameLab) 대회에서는, 무려 우주,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과 같은 듣기만 해도 겁먹을 법한 무거운 주제를, 누가 누가 더 편하고 흥미롭게 전달하는지 서로 겨룹니다. 과학 그 자체 이외에도 일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발견했기에, 과학에서는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PUS) 분야가 개척되고 발전되고 있습니다.

과학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친절하고 찬찬한 노력을, 법 분야에서도 접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과학에의 교양 못지않게 법에 대한 소양도 의미가 있음은 물론입니다. 거대하지 않아도, 당장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현실을 다루는 법을 알아두는 것은 실용성 측면에서 효용이 적지 않습니다.

독일에서는 법전이 베스트셀러라는 풍문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마침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를 찾아보니, 민법전이 13위, 노동법전이 37위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2021. 1. 23. 기준). 모르긴 몰라도 독일인들의 법에 대한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우리나라 독서 시장을 지탱하는 독자들은 아쉽게도 책 제목에 ‘법’이 들어가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법을 떠올렸을 때 느껴지는 딱딱함이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비유컨대, 우리가 야구 경기를 하거나 볼 때, 집중하고 주목하는 대상은 규칙이 아니라 경기 그 자체입니다. 규칙이 가지는 수단성으로 인한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야구 규칙을 깔끔하고 단정히 설명하려는 시도가 여전하고, 종종 성공적인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야구 룰 교과서(Baseball Field Guide)」 같은 책은 그림과 사례를 충분히 제시함으로써 야구 팬에게 야구 규칙의 가이드로서 역할을 제법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응용한다면, 홈런을 설명할 때, 단지 ‘인플레이 중 타자가 홈으로 들어와 득점한 상황’이라고 하기보다는, ‘이승엽 선수가 타석에 들어설 때, 사람들이 내야석 대신 외야석에 자리잡고 잠자리채를 준비한 이유’라고 하거나, 도루를 이야기할 때, ‘베이스에 있는 주자가 공과 상관없이 다음 베이스로 가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이종범 선수의 별명이 바람의 아들인 이유’라고 하는 식입니다.

여기서 법의 전문성과 대중성을 이을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풍부한 사례를 정갈하게 전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례를 통해 법을 이해하는 것이나 법을 통해 사례를 분별하는 것은, 관점이 다를 뿐 결국 서로 맥락이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규범과 현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실제 사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법과 사안을 모두 헤아리기 수월해집니다.

법이 사안을 만나 사례화되는 것이 바로 판례입니다. 판례는 복잡하게 얽힌 사실관계를 요연하게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법을 해석·적용하며, 법리화합니다. 따라서 법과 이론을 통해 판례를 바라볼 수도 있지만 거꾸로 판례를 통해 법과 이론을 파악해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불공정한 법률행위’라는 개념을 접할 때, 단지 그 뜻을 풀어 이론적으로 풀고자 하기보다는, 회사가 은행과 체결한 키코(KIKO) 통화옵션계약이 불공정행위인지 여부가 쟁점이 된 판례를 사례로 만나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2013다26746 전원합의체 판결 등). 통화옵션계약의 내용 무엇이고 구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계약을 체결할 당시 회사의 달러 매출액은 얼마인지, 환위험관리를 어떻게 하여 왔는지, 은행은 회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등을 모두 판례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불공정행위의 의미를 역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임의 기수시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임’, ‘기수’의 의미에 곧바로 천착하기보다, 회사원이 회사의 영업비밀이나 영업상 주요한 자산을 반출하는 사안을 떠올리면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2017도3808). 해당 판례는 회사원이 회사의 영업비밀이나 영업상 주요한 자산을 재직 중에 반출한 경우, 적법하게 반출했는데 퇴사하면서 반환하거나 폐기하지 않은 경우, 나아가 반환하거나 폐기하지 않은 것을 경쟁업체에 유출하거나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 경우를 각각 나누어 언제, 어떻게 회사원에게 배임죄의 죄책을 물을 수 있는지 구조화하여 놓았습니다. 따라서 해당 판례를 봄으로써, 법리화된 ‘배임의 기수시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법무관 시절에는 군법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법원에서는 법관과의 대화라는 이름으로,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법의 이론과 원칙을 먼저 말씀드리기보다, 관련 판례를 충분히 들어, 법의 시각으로 볼 때 어떻게 사안이 재구성되는지를 말씀드리면 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돌이켜보니, 그 방법이 우리가 법에 다가갈 수 있는 편안한 방법 중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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