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4-판례공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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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4-판례공부의 의미
  • 손호영
  • 승인 2021.01.14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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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1. 한 선비가 문리(文理)를 깨우치기 위해 명사에게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명사가 “맹자를 삼천 번 읽으면(孟子三千讀), 문리가 탁 트인다.”는 믿지 못할 말을 합니다. 선비는 속는 셈 치고 삼천 번을 읽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효과가 없었습니다. 분개한 선비가 항의 편지를 썼는데, 과연 명문이었다고 합니다.

#2.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여 명성을 떨친 하인리히 슐리만은 외국어 습득에서도 일가견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고전으로 알려진 책 한 권을 잡아 대단히 많이 음독하며 전부 암기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그가 마스터한 외국어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스웨덴어...

#3. 이미 일반에 잘 알려진 ‘1만 시간의 법칙’이란, 실상 단지 1만 시간을 채운다고 실력이 상승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합니다. ‘의식적인 연습’, ‘목적의식 있는 연습’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즉, 그저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높은 경지를 위해서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다양한 시도를 통해, 의식적·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연습해야 한다고 합니다.

맹자를 삼천 번 읽는다고 없던 문재(文才)가 느닷없이 생긴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외국어 텍스트를 통암기한다고 해당 외국어를 마스터하리라 기대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해낸 사람들의 꿈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솔깃합니다. 이런 내용이,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이름 하에 통계적·이론적으로까지 확인된 것이라면 이제는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연습’이 숙달과 능통의 필수 요건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잘 살펴보니, 맹자삼천독과 통암기법 이야기에는 반복 연습 말고 공통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잘 된 모범 텍스트’를 골라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본의 가치가 높을수록 모방과 흉내의 효용이 올라감은 당연한 이치이겠습니다.

법 공부에서 ‘잘 된 모범 텍스트’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보았습니다.

첫째는 단연 법조문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적과 흑을 쓴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은 명료함과 간결함을 익히기 위해 나폴레옹 법전을 매일 읽었다고 하고, 칼의 노래로 이름난 소설가 김훈도 군더더기 없는 문체를 다잡기 위해 법전 읽는 것을 즐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법률가의 우선적 역할이 법조문 해석이라는 점까지 더해보면, 법조문을 읽는 데 부지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둘째는 판례입니다. 대법원에서 공들여 공개하는 판례는 대법관, 재판연구관들의 고민이 한껏 배여 있습니다. 그 고민이 정제되어 표현된 논리 구조와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안과 법리, 결론을 함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부동산 이중매매의 배임죄 성부’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7도4027)은, 다수의견-반대의견-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반대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순으로 각 논리가 서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며 공방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쓰이는 법리, 논리, 근거를 눈여겨보면 같은 법조문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결국 정리된 결론과 그 흐름이 어떻게 적용될지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각 논리에서 인용하는 배임죄 관련 참조 판결도 꽤나 많습니다. 임차권 이중양도의 경우(90도1216), 금전채무를 변제할 것을 약정하면서 자기 소유인 부동산을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지 않겠다는 약정을 하고도 제3자에게 근저당권을 설정한 경우(84도2127), 공사대금 채무의 변제를 위하여 채권자에게 신축 연립주택의 분양권을 위임하는 계약을 체결하고도 다른 사람에게 해당 연립주택을 처분한 경우(86도2490) 등 각 판결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중매매의 배임죄 성부와 관련해서는 대법원에서 일련의 흐름을 보이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산의 이중양도(2008도10479 전합)→대물변제예약을 체결한 부동산을 처분한 경우(2014도3363 전합)→부동산 이중매매(2017도4027 전합)→양도담보로 제공한 동산을 처분한 경우(2019도9756 전합)→부동산 이중저당(2019도14340 전합) 등 관련 판결이 나오고 있는데, 각 판결의 결론과 이유를 통해서, 대법원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배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단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각 판결의 흐름과 인용된 판결을 함께 살펴보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리를 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의식적인 연습’과 다름없을 것이고, 이를 반복해나가다 보면 해당 사안을 이해하는 데에는 물론 전반적인 법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선비의 맹자삼천독, 슐리만의 통암기법, 스탕달과 김훈의 법전 다독과 판례공부는 서로 멀지 않고, 그 맥락은 서로 통한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판례공보를 꾸준히 익히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새겨보았습니다.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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