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2-수수께끼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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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2-수수께끼 탐구
  • 손호영
  • 승인 2020.12.3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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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부모 마음은 자나 깨나 자식 걱정입니다. 어린 아이를 남기고 가는 상황에 보호자라고 할 만한 이가 영 미덥지 않은 경우, 부모 마음은 더욱 어지럽습니다. 자녀가 기댈만한 유일한 버팀목을 재산이라고 믿는 경우에는 특히 보호자가 재산을 흩어낼까 저어합니다. 부모는 긴 고민 끝에 자식을 위해 유언을 남깁니다. 수수께끼 형태로 된 유언을,

#1. 중국에 장씨 성을 가진 부호가 있었습니다. 본처에게서 딸을 보고 후처에게서 느지막이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은 일비(一飛)라고 지었습니다. 딸은 장성해서 시집을 갔고 아들은 여전히 어렸습니다. 부호는 유언을 남깁니다.

「張一非吾子也家産盡與吾婿外人不能爭奪」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단서는 이렇습니다. ‘장일비오자야(張一非吾子也)’라고 읽히는 첫 여섯 글자 중 끝 부분 두 글자는 오자(吾子), ‘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글자는 非라고 적혀있는데, 음(소리)은 ‘비’, 훈(뜻)은 ‘아니다’입니다.

#2. 조선시대 황해도에 논밭 많은 지주가 있었습니다. 늘그막에 막내를 보았습니다. 첫째가 결혼할 무렵 막내는 열두 살이 되었고, 지주는 유언을 남깁니다.

「모든 재산을 첫째에게 남긴다. 막내에게는 초가집 한 채, 논 한마지기, 궤짝 하나를 남겨준다.」

그 궤짝 위에는 이런 글씨가 적혀있었습니다.

「열여덟 살이 된 이후 현명한 원님이 오시면 궤짝을 열어보라」

보물이 있을까 했던 막내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고 궤짝 안에는 흰 갓, 흰 도포, 미투리, 흰 종이, 붓, 벼루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장일비의 누나는 유언장의 ‘장일비오자야’를 ‘장일은 내 아들이 아니다.’로 읽었습니다. 非를 뜻(아니다)으로 새기고, 장일비의 이름 중 비는 단순 누락이라고 봤습니다. ‘장일(비)은 내 아들이 아니다. 집안 재산은 내 사위에게 모두 준다. 외부 사람은 다툴 수 없다(張一/非吾子也/家産盡與吾婿/外人不能爭奪)’

누나에게 재산을 빼앗겼다 여긴 장일비는 청년이 된 뒤 아버지 뜻이 그럴 리 없다며 조정에 억울함을 아룁니다. 조정 대신이 주의 깊게 보더니 非를 음(비)으로 새깁니다. 아버지가 일부러 장일비의 비(飛)를 비(非)로 바꿔놓았다는 것입니다. ‘장일비(非→飛)는 내 아들이다. 집안 재산을 모두 준다. 내 사위는 외부 사람이니 내 가산을 두고 다툴 자격이 없다(張一非/吾子也/家産盡與/吾婿外人/不能爭奪)’ 아들은 마침내 잃어버린 아버지의 재산을 되찾았습니다.

황해도의 어린 막내도 열여덟이 되어 현명하다 이름난 원님을 찾아갑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원님이 고심하다 무릎을 치며 말합니다. ‘막내가 나이가 차 재산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갓, 도포, 미투리를 가지런히 정제하고, 정성스레 소장을 써서 소송으로 재산을 되찾으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며, 막내에게 재산을 돌려줍니다.

두 가지 수수께끼가 숨긴 정답은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남긴 애정이었고,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제3자가 지닌 통찰이었습니다. 법률가로서 주목할 만한 점은 수수께끼가 풀리는 과정이 결국 소송을 통한 ‘해석’이었다는 것입니다. 유언장이든, 궤짝이든 본래 그 뜻을 탐구하고 밝히는 작업, 바로 법률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조정 대신, 원님도 당시에는 법률가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대한주택공사가 임대주택을 분양전환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임대주택법에는 우선분양권리자로 ‘입주일 이후부터 분양전환 당시까지 당해 임대주택에 거주한 무주택자인 임차인’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문제 된 임대주택 거주자는 75세의 노인으로, 처의 병수발 때문에 직접 대한주택공사를 찾아갈 수 없어 자신의 돈을 관리하던 딸을 통해 딸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때문에 노인은 법상 ‘임차인’이 아니어서 임대주택을 분양받을 수 없었습니다. 대한주택공사는 임대차기간이 만료되었고 임대주택에 대한 분양전환이 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노인에게 주택에서의 퇴거를 구했습니다.

항소심(대전고등 2006나1846)은,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대한주택공사)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며, 법상 임차인의 의미를 ‘실질적 의미의 임차인’으로 해석하고, 노인이 실질적 의미의 임차인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며, 대한주택공사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법 해석에 문언뿐만 아니라 법이 달성하고자 하는 정책목표, 우리 사회가 법체제 전체를 통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가치를 함께 고려함이 타당하지 않은가. 항소심이 던진 질문에 대법원(2006다81035)은 이렇게 답합니다. ‘법..(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법의 표준적 의미를 밝혀 객관적 타당성이 있도록 하여야 하고, 가급적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대법원은 항소심이 세운 ‘실질적 의미의 임차인’이란 의미는 모호하고, 이 사건 임대차계약의 당사자는 딸이라는 점을 확정한 후, 대한주택공사의 청구를 기각한 항소심을 파기하고 환송했습니다.

법상 ‘임차인’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수수께끼에 항소심과 대법원이 다른 답을 했습니다. 원칙을 세워 기준을 정립할지, 특별하고 딱한 사정을 예외로서 인정할지, 법 해석이 그만큼 어려운 문제라는 방증입니다. 판례를 공부한다는 의미는 이와 같이 법원이 법 해석을 할 때 고민한 내용과 과정을 공부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러 사례에서 이미 이루어진 논의를 따라 공부하다 보면, 조금씩 해석의 체계가 정립되지 않을까요. 판례공보를 꾸준히 보고 정리할 여러 이유 중 하나이겠습니다.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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