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1-판례스터디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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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1-판례스터디의 추억
  • 손호영
  • 승인 2020.12.2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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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스트레스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이 다를 때 생기더군요. 그 괴리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때가 사법연수원 1년차였습니다. 연수원 유예를 하는 바람에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연수원 일정은 무심하고 무참히 흘러갔습니다. 공부를 해야 했던 때, 속내로는 공부 말고 다른 가치를 좇았던 값은 비쌌습니다.

나름 소년등과에 제법 성적도 우수했던 제가 받아든 사법연수원 1년차 성적은 충격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깟 시험, 그저 점수일지 모르지만,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을 평가받는 방법이자,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이 몸을 갉아먹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보게 되었고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P형과 Y형입니다. 연수원 동기이자 대학교 선배인 P형과 Y형이 하던 스터디 모임에 받아 달라 부탁해보자.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범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절절한 요청에 비해 P형과 Y형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줬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마음입니다.

사법연수원 4학기 시험은 범위가 없는 시험입니다. 사법연수원 1년 동안 형식을 배웠다면, 그 내용을 채워 시험에 대비해야 했는데, 그 내용이 바로 판례였습니다. 모두 최근 몇 년간의 민사판례공보, 형사판례공보를 프린팅해 책으로 편철해 공부했습니다. 스터디 모임에서도 판례공보를 발제하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판례스터디는 P형과 Y형의 탁월함으로 컬러풀할 수 있었습니다. P형은 짐짓 던지는 질문이 매서웠습니다. 언제나 출제자가 가질 법한 의도를 파악하려 하고, 판례에서 후속 질문을 도출해냈습니다. 체계화에도 능했는데, P형은 판례에서 세운 법리를 원칙-예외-예외의 예외 등의 논리트리로 이해했습니다. Y형은 놀라운 기억력과 이해력에 꼼꼼함이 더해졌습니다. 줄글로 판례의 논리를 엮어내고, 이러한 사안에서 왜 이러한 결론이 나는지, 저러한 사안에서는 왜 결론이 다른지 풀어내어, 판례 뒤에 숨은 풍부한 배경도 살필 수 있었습니다. 우선 배우는데 급급했던 저는 두 탁월함이 종종 미루거나 간과하는 작업을 하면서 스터디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나왔을 때 메모해두었다가 그 답을 검색하고 근거를 찾아오는 작업, 하급심을 찾아 사실관계를 보충 확인하는 작업, 유용한 아이디어를 슬며시 정리하는 작업이 제가 했던 일입니다.

즐거웠고, 알찼습니다. 자칫 열패감에 좀먹힐 뻔 한 제가, 버거운 공부를 기어코 해내고 역전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개인 공부를 하고 오후 10시쯤 모여 새벽까지 독서실 탁자에서 열띠게 발제하고 논의하고 정리하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판례스터디는 성공적이었고, P형과 Y형, 그리고 저는 모두 법무관을 거쳐 법관이 되었습니다.

법 실력이 가장 크게 성장했던 판례스터디의 좋았던 기억은 저로 하여금 법관이 된 후에도 판례공보를 공부하게끔 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나오는 공보를 보면서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토대는 스터디에서 배웠던 대로입니다. 논리트리를 만들고, 체계화하며, 정리한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는 여러 동료들과 스터디를 꾸리기도 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공부한 판례공보를 꼭 사건으로 만난다는 것입니다.

2015년 형사항소, 2018년 형사합의, 2020년 형사단독 업무를 맡으면서도 판례공보를 공부했고, 주말에 개인노트로 정리하던 저는 책으로 내볼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판례스터디의 경험은 긍정 일색이지만, 당시에도 두터운 판례집은 시간상 다 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판례공보를 핵심만 요약해내면, 수험생 여러분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당시 저에게 이런 참고서가 있으면 필요할지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출간하기로 한 [대신 정리해주는 5개년 형사판례공보 요약정리]는 수험적으로 관련이 없거나 적은 판례는 [제외된 판례] 항목으로 열거해두었지만, 그 외 모든 판례를 [사안(사실관계)]-[결론]-[이유]-[정리]-[참고] 순으로 압축하여 요약해두었습니다. 참고할 만한 [법령]과 [법리]도 별도로 적어두었습니다. 특히, 사실관계를 최대한 시간 순서대로 요약·정리해 적시된 사실관계만으로도 어떤 쟁점이 문제가 되는지, 판례의 결론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법원 설시만으로 잘 알 수 없는 경우에는 하급심을 참조해 적어두었습니다. 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에서 판례가 어떤 법리를 적용했고 어떤 결론을 도출했는지 파악하도록 했는데, 모두 판례스터디의 경험을 토대로 하였음은 물론입니다. 참고로 P형은 유죄 사례에는 주황색 형광펜을, 무죄 사례에는 녹색 형광펜을 사용해서 직관적으로 구별하기도 했습니다. [정리]와 [참고]는 스터디에서 P형과 Y형이 했던 역할을 떠올리며 적었습니다. 논리트리를 만들거나, 시각적으로 간결히 그려두거나, 관련 판례를 정리해두는 식입니다.

P형과 Y형이 판례에 대해 한 이야기가 새삼 떠오릅니다. “공정한 시험에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문제를 내기 위해서는 판례 사안과 그 결론을 따올 수밖에 없다.” 개인이 창조한 문제는 논박이 가능하되, 판례는 대법원이 구체적 사실관계에 대한 법리를 세우고 답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험적으로 판례는 그 자체로 문제의 보고(寶庫)입니다.

판례공부는 사실 제가 업무를 함에 있어서도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대신 정리해주는 5개년 형사판례공보 요약정리]는 저의 개인노트를 토대로 조금 더 깔끔하게 매만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판례스터디를 추억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예전보다 더 시간에 쫓기고 있는 수험생 여러분들께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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