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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사라진 ‘강의의 맛’과 공간의 ‘의미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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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사라진 ‘강의의 맛’과 공간의 ‘의미 재편’
  • 신희섭
  • 승인 2020.09.11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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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br>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1주일이 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2.5 단계로 오르고, 카메라만 보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학생도, 조교도 없이 오로지 카메라만 응시하면서 강의중이다. 텅 빈 강의실의 의자들 위에는 사회적거리 두기 안내 문구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1주일 전에만 해도 이 상황을 어떻게 버텨낼지 걱정이었다. 학생없이 카메라 촬영만으로 강의진행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과거에도 몇 번이고 카메라촬영강의를 해본 적이 있다. 강의 짬밥이 있는데, 학생이 있고 없고에 따라 강의의 질적인 차이가 크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강의의 맛’이다. 그렇다. 정확히 강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강의의 맛’이 없을 것이 걱정되고, 그래서 재미있게 이 강의를 해나갈 수 있는지가 걱정이었다. 게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진행할지 모르는 것이 더 걱정이다.

강의를 많이 해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강의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눈빛과 강의실안의 묘한 긴장감을.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적인 이들에게 새로운 정보가 전달되는 때 만들어지는 일종의 쾌감을. 그리고 “우와 그렇구나!”하는 반응이 전해질 때 느껴지는 일종의 정복감과 성취감을.

카메라는 절대로 보내줄 수 없는 이 ‘맛’에 익숙해지면, 강의는 어마어마한 즐거움이 된다. 강의는 마치 작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처럼, 혹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뿌듯함을 준다. 그 ‘맛’에 4시간 가까운 시간 내내 열정을 가지고 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강의의 맛’을 느낄 수 없고 오로지 정보만 전달해야 한다. 어떠한 피드백도 없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내용에 대해 궁금해 할지나 더 설명을 필요로 하는지와 관계없이 무조건 내달려야 한다. 크루즈 운행을 설정하고 달리는 단조로운 고속도로처럼.

1주일째다. 그런데 그 사이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째, 강의실에 수강생이 있는지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 둘째, 강의실에 들어가서 강의를 하는 것이 덜 두렵게 되었다. 셋째, 아무도 없지만 어떤 이슈에 대해서는 약간의 농담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화면을 향해서 혼자 농담을 던지면서 강의의 호흡조절을 하는 내 자신을 보고 내가 좀 이상하게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가 걱정된다.

혹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개인방송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저 안해본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거나, 변화에 대한 사소한 변명일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래도 강의를 하는 것이 어디냐고 할 것이다. 그렇다. 코로나 시국에 그래도 강의를 할 수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고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나 “왜 내가 하는 일에 정부가 과도하게 간섭을 하는가?”가 아니다. 내가 하는 ‘강의’라는 대상이 이전과 다르게 진행되고 있고, 여기에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적응이 ‘발전적 적응’인지 ‘퇴행적 적응’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환경변화에 나름 적응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이런 적응이 수많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자리를 채우고 식사를 하는 식당에서, 바로 내린 커피를 마셔야 하는 카페에서, 같이 땀을 흘려야 하는 운동시설에서, 강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내는 고수부지에서. 공간이 주는 ‘공간의 맛’을 포기하거나 그 ‘공간의 맛’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않을 자리가 없던 유명 식당들이 포장과 배달을 하고, 병원에 가지 않고 진료를 보는 일들이 생기고, 직장과 학교가 집안 책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공간들이 줄 수 있는 기능이 변화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공간의 역할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를 새롭게 창출해내는 ‘창발적 적응’인지 죽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생존적 적응’인지는 일의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간의 맛’을 찾고 있다. 이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이태원을 가보면 알 수 있다. 이태원이라는 다양성의 ‘공간’과 그 공간들이 만들어낸 생태계가 거의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급속한 ‘적응’에 따른 잔인한 자연의 ‘진화와 도태’를 보는 듯하다.

최소한의 필요한 것. 황홀한 ‘강의의 맛’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면서 옅은 끈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환경에서 의사소통을 유지하는 것. 그저 그것으로 족할 때가 있다. 강의가 재개되어도 이런 적응과정의 지속적인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언젠가 강의실은 강의를 듣는 이들로 다시 차겠지만, 언제고 다시 온라인의 공간으로 변환될 수 있을 것이라는 걱정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이 적응과정에 대한 회복탄력성의 정도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의미가 조금은 달라진 공간들에 맞추면서 살아갈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일반화를 위해 좀 복잡한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다. 지정학에 따르면 기술 발전이 공간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공간의 의미 변화가 ‘시간’ 인식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 변화는 인간과 정치공동체의 운영방식을 바꾼다. 그런데 현재 코로나 같은 질병과 위기도 공간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적응하게 만든다. 다만 그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 잘 모르겠다. 그러니 우선 버티고 보자.

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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