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법 실무(22)-2020년 여름, 쿼런틴 시대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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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법 실무(22)-2020년 여름, 쿼런틴 시대의 일기
  • 박준연
  • 승인 2020.08.2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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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
박준연 미국변호사

최근에 일기를 쓰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서이기도 하겠고, 유례없는 시대를 보내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기록을 남기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부족한 글재주로라도 2020년 여름의 생활에 대해 조금 써보고 싶었다.

무너진 일상, 새로 시작하는 일상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상이 변했다. 원래부터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롭기는 했으나, 재택 근무를 주로 하면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하루를 보내는 날도 없지 않게 되었다. 일이 바쁠 때는 일 외의 생활이 극히 단순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집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하게 되면 더더욱 생활이 단순해지고, 특히 업무와 업무 아닌 생활의 경계도 모호해지게 되었다. 한창 바쁠 때는 눈뜨자마자 일을 시작해서 씻고 먹는 시간 외의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낼 때도 있었다.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일과 그 외의 생활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따로 업무용 서재를 만들 수 있는 형편은 안되지만, 업무를 하는 테이블에 컴퓨터를 두고 일은 이 테이블에서만 하기로 했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도 시각적으로 업무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선 긋기에 도움이 되었다.

비디오로 하는 피트니스 세션도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오피스에서 재택 근무가 시행되면서 회사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뉴욕의 인스트럭터 분들이 한 시간씩, 미국 시간으로 이른 아침과 저녁시간에 비디오로 운동을 지도해준다. 저녁 시간 운동을 마치고 나서 씻고, 일이 남아있으면 차를 마시면서 일을 계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쉬는데, 이제껏 운동을 그리 열심히 해오지 않은 나이지만, 땀을 흘리고 나면 오늘 하루도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하는 기분이 된다. 일상이 소중한 것은 반복되는 일상과 연계되는 감정, 기분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뿐만 아니고 다들 우울, 의기소침해지기 쉬운 요즘, 이 정도까지 균형을 유지하며 몇 개월을 보낸 데에는 미용실 원장님, 아니 뉴욕의 인스트럭터 휠즈님의 공이 크다.

투입과 산출, 책 읽는 여름

바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서는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대부분의 변호사의 업무 중 가장 큰 부분이 읽고 쓰는 업무이다. 일이 바쁠 때는 업무 외에 읽고 쓰기가 최소화된다. 업무와 관련된 읽고 쓰기만 반복하다 보면 투입-산출 중 산출만이 반복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일과 관련이 없는 좋은 문장을 읽고 곱씹는 것이 일종의 투입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날 때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총아였던 바이오테크 기업과 그 CEO가 희대의 스캔들로 전락한 사건을 끈질긴 취재를 바탕으로 집필한 배드 블러드(Bad Blood)를 이 책이 화제가 되고 2년여가 된 지금 읽게 되었다. 픽션보다 논픽션이 때로 더 기이하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단순히 읽을거리로서도 재미있었지만, 정보의 통제와 조작이 가능했던 조직 문화, 그런 조직을 고착시킨 여러 요인에 대한 묘사가 특히 흥미로웠다. 일과 무관한 글쓰기라고 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부조사를 할 때는 문서를 검토하고, 관련 임직원들을 인터뷰하여 조사 보고서를 쓰는데,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같은 조사를 하여 집필한 이 책은 잘 쓴 내부조사 보고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일상의 소중함에 대하여

이번 여름에는 또 마츠모토 세이쵸의 작품 평론을 읽고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여러 편을 보았다. 40대 초반에 작가로 데뷔하여 알려진 작품 수가 약 천 편, 원고지 매수로 환산하면 약 12만 매에 이른다는 다작 작가인 세이쵸는 1992년 세상을 떠나고 지금까지도 드라마, 영화화되고 있으니 가히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릴 만하다. 특히 그가 세상을 떠난 8월에는 추모 특집으로 영상화된 그의 작품이 많이 재방송된다. 아예 대놓고 비교하며 즐기라는 의도인지, 60년대, 80-90년대, 2000년대에 같은 원작으로 드라마화된 작품을 이어서 재방송해줄 때도 있는데, 마치 들어도 또 듣게 되는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이번 여름에도 많은 영상물을 시청하였다. 그의 작품 테마 중 하나가 따분할 정도로 평화로웠던 일상의 붕괴이다. 성실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에 이른 주인공이 어느 날 작은 욕심, 호기심으로 일상에서 일탈하게 되고 그 작은 일탈로 인하여 평화로운 일상이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는 이야기이다. 파멸에 가까워진 주인공이 예전의 평화로웠고 따분했던 일상을 그리워하는 장면은 그의 작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맥락은 다를지 몰라도 일상의 붕괴에 대해 생각해보는 요즘이다. 올해 2월, 수트 케이스를 하나 장만했다. 한참 전에 계획되는 출장도 있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출장을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기내 반입이 안되는 수트케이스를 들고 출장을 가게 되니 출장지 도착해서, 출장 후 짐 찾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기내 반입이 되는 수트 케이스를 하나 마련하려고 벼르다가, 고민 끝에 산뜻한 라임 그린 색의 수트 케이스를 골랐다. 그 이후는 출장도 여행도 갈 일이 없어지고, 새 수트 케이스도 포장을 벗기지 않은 채이다.

요즘에는 수영장에 자주 간다. 도쿄도 한동안 운동 시설이 문을 닫았다가, 최근 인원 제한을 두고 다시 개장했는데, 이 수영장은 원래부터 사람이 많지 않고, 운이 좋으면 해질 무렵 어둑어둑할 때 혼자서 도쿄 타워가 보이는 광경을 독점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로스쿨 다닐 때도 수영장에 갔었다. 진한 염소 소독약 냄새가 나는 수영장에서 레크리에이션 수업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전 올림픽 러시아 국가대표였다는 강사님의 스파르타식 40분 수업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풀 밖으로 나오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그때 처음 다이빙 용 깊은 풀에 들어가 보게 되었다. 외무고시 2차시험을 치고 뒤늦게나마 동네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워 물이 무섭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바닥이 보이지 않고 발이 닿지 않는 깊은 풀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공포는 만만치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라 이건 무슨 비유나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발이 닿지 않는 풀에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것이 그때의 내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싶고. 여기까지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회의 때 마스크를 쓰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는 여전히 겨울 코트를 입었다. 그 후 봄이 오고, 긴 도쿄의 장마철을 지나 한여름이 되고, 드디어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해서 가을이 오는구나 싶은 시기가 되었다. 그 사이에 몇 건의 안건이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로스쿨 모교에서 학기를 시작한다는 알림 메일이 왔다. 반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금의 상황을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드물고 신기한 경험으로 회상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기억하게 될까. 생각해도 답이 없는 나는, 요즘 키우면서 이파리를 뜯어서 먹기도 하는 시소 화분에 물을 준다.

박준연 미국변호사는...

2002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수석 합격한 재원이다. 3년간 외무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최상위권 로스쿨인 NYU 로스쿨 JD 과정에 입학하여 2009년 NYU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Kelley Drye & Warren LLP’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로펌 중의 하나인 ‘Latham & Watkins’ 로펌의 도쿄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필자 이메일: jun.park@l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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