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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관용과 옹졸, 가학과 광기가 배제된 미투 기준 정립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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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관용과 옹졸, 가학과 광기가 배제된 미투 기준 정립 필요
  • 오시영
  • 승인 2020.08.1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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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오시영</strong>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관용과 옹졸은 다른 말 같지만 같은 말이라 생각한다. 단지 그 단어가 상징하는 수용의 폭이 전자는 넓은 반면 후자는 좁을 뿐이다. 다시 말해 허용하는 폭이 넓은 자가 좁은 자를 향해 옹졸하다 하고, 반대이면 관용적이라고 할 뿐이다. 그렇다면 정도의 차이일 뿐 관용과 허용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꼴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관용과 옹졸의 틈을 메꾸기가 결코 쉽지 않다. 끝없는 싸움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종결점이기도 한 저 허용의 한계를 놓고 우리는 끊임없이 다툰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죽음 뒤까지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은 물난리로 뒤숭숭하다. 코로나19감염으로 마음에 평화가 없더니 집중호우로 인한 물난리가 고통을 가중한다. 수많은 이재민이 가족을 잃거나 재산을 잃고 망연자실해 한다. 국가재정이 집중적으로 신속하게 투자되어 재난극복에 도움을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발적 국민참여를 통해 복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 생을 살아낸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이다.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고령사회 진입으로 “고령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경제이론의 정립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은퇴 후 수십 년 세월을 직접적 경제활동 없이 저축해 놓은 예금(원금 및 이자)이나 연금, 부동산 임대수수료, 주식배당금, 자식들의 부양료 부담 등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령층의 경제적 부담이 고령층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고령사회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온 서구와 달리 급격하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의 경우, 연금제도 등 사회적 부양체계가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고령사회를 맞게 됨에 따라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다.

최근 들어 많은 선배 지인들이 하나같이 “복지요양시설에 수용”되는 형상을 지켜보며, 건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노후 생활기반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1940년 이전 세대에게는 커다란 재앙이겠다 싶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 치매, 중증 암치료 및 장기복지요양시설 수용 시 정부의 복지지원비 부담비율이 높아져 본인 부담금이 급격히 감소되어 그를 부양해야 하는 자손들의 부담이 완화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 보면 요양시설에 수용되어 단순히 삶을 연장하는, 보기에 따라서는 무용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년의 삶이 참으로 슬프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고령 경제학”에서는 노후의 건강관리를 위한 젊어서부터의 건강관리 방법, 은퇴 후 삶을 살면서 부담해야 할 경제적 지불능력의 준비, 치매 및 심신미약상태의 노후 치료 및 보호를 위한 주거 확보 방안과 의료체계 정비 방안, 고령 인구를 위한 각종 생활용품 개발 및 그들을 상대로 한 경제수익 창출 방안, 그들의 재산 관리 및 정확한 법률행위를 보장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 등 다양한 관점들을 집중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도 보건복지부 산하에 “노인청(어르신청)”을 신설하여 고령 인구층에 대한 종합적 행정 지원 체제를 마련할 필요성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이 한 세미나에서 “주택청”의 신설을 주장한 바 있는데, “노인청”도 함께 검토해 보았으면 한다.

필자는 오래 전 한 잡지에 “부고장 쓰기”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저의 죽음을 당신께서 슬퍼해 주신다면 저의 영혼길이 조금 덜 외로우리라 생각합니다. 혹여 조문하실 의향이시라면 찾아오실 때 가장 곱고 아름다운 밝은 색의 옷을 입고 오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국화 대신 예쁜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오신다면 더 더욱 기쁘겠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저와의 귀한 인연에 대해 제 아들에게 한 마디라도 들려주신다면 제 아들이 저를 추억하며 당신을 더욱 소중히 모시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져봅니다”라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부고장에는 몇 가지 내용이 더 포함되어 있다.

왜 갑자기 오래 전 발표한 “부고장 쓰기”라는 글이 떠올랐냐 하면,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 국회 등단”이 “비난 보다는 응원”이 더 많은 세상으로 변하는 것을 실감하였기 때문이다. 2003년 4월29일, 당시 44세이던 유시민 의원이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후 국회에서 “의원 선서”를 하는 날 남성 국회의원들의 통상적 복장이던 양복 정장 대신 하얀 “백바지”로 상징되는 캐주얼한 복장으로 등단하여 선서하려 하자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유시민 의원의 캐주얼 복장이 국회를 모독하는 행위”라며 항의를 한 후 퇴장하는 바람에 의원 선서가 연기된 적이 있었다. 결국 그 다음날 정장 차림으로 의원 선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27세의 류호정 의원이 통상 여성 국회의원들의 정장 차림과 다르게 화려한 원색의 원피스를 입거나 청바지를 입고 백팩을 등에 짊어진 “신세대 복장”에 대해 처음 몇몇 의원이 “유시민 백바지 반응”을 보였지만, 그것은 잠시, “원피스가 어때서?”라는 “꼰대 짓 그만 해라!”라는 여론에 밀려 그녀의 원피스 복장은 여성 국회의원이 입어도 관용되는 의상으로 정착되었다.

인간은 기호적 동물(homo signans)이다. 기호, 상징을 통해 자신의 내심을 표현한다. 위 두 현상에서 보듯 백바지의 불허가 원피스의 허용으로 17년 만에 바뀌었다. 옹졸의 벽이 관용의 창으로 바뀐 것이다. 이 17년의 역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단한 “시대적 관절(關節)”이라 할 수 있다. 17년의 역사 속에는 “노무현의 5년”과 “인터넷 세대”가 융합되어 있다. “시대의 이단아”였던 노무현의 사상과 가치로 교육받은 17년의 세대가 지금의 20대와 30대가 되었고, 그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꼰대사회가 주류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는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꼰대사회는 이제 “고령화 사회의 요양원세대”로 내몰리며 사회적 파급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초로 대통령 집무실에서 노트북, 인터넷 컴퓨터를 실용화하여 국정을 수행하였다. 컴퓨터로 내부문서를 결제하고, 지시를 내리고, 국정 전반을 살펴보았다. 전국 학교에 컴퓨터시설을 보급하였고, 교육 현장에서 컴퓨터의 일상화를 이루어내었다.

이에 뒤질세라 학생들은 컴퓨터로, 모바일폰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문명에 익숙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유튜버로 상징되는 인터넷 여론 결집 세력이 되었다. 더 이상 비디지털 문명에 익숙한 꼰대들의 복장 타령을 허용할 수 없다는 “옹졸한(?) 세대”가 되어 버렸다. 연장자의 관용을 기다리는 세대가 아니라 연장자의 옹졸을 꾸짖는 새로운 노무현 키드시대인 것이다. 이제 세상은 보수의 꼰대정치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환원되지 않을 것이다. 고도의 고등교육을 받은 신세대들이 이 나라의 주역이 되어 있는 현 체제 하에서는 더 이상 몇 사람의 선동이, 주류언론이라고 하는 조선, 동아, 중앙의 여론조작이 허용되지 않는 체제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다.

그러한 꼰대문명에 익숙한 “비컴퓨터세대”가 “요양원 세대화”되는 현실 앞에서 세상은 분명 바뀔 것이고, 지금도 바뀌어가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그 컴퓨터 시대의 관용의 정신이 옹졸의 세계로 접어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인터넷이라는 열린 광장을 통해 집단지성을 발휘하다가도 어느 순간 극단의 개인적 이기심에 몰입하는 새로운 옹졸의 시대를 비결집의 세력화가 될 수도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 옹졸의 시대에 사람들은 무기력해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극단적 폭력성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거기에 코로나19 감염병이 결합하여 오프라인 모임을 통한 유기적 상호연결성이나 연대의식이 옅어질까 염려된다. 함께 살을 부비는 접촉이 비대면화되면서 서로 상관없는 사람으로 심리적 거리감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무감각의 세상으로 내몰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자신과 가족에 대한 재판이 어느 정도 정리단계에 접어들자, 자신과 가족에 대해 무차별적인 가해행위를 저질렀던 언론과 유튜버 등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대응에 나섰다.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이 병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다. 특히 딸에게 무례하고 불법적으로 취재행위를 한 조선일보 기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는 법원의 법적 평가에 의해 그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어 있다. 그 재판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덩달아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해 미투운동의 가해자라고 고발한 법률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가 한 시민단체에 의해 “무고죄” 등으로 고소당하였다. 현재까지 고소인측에서 주장하고 증거로 내세운 자료들로만 볼 때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 미투 가해행위”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해 보인다. 2주 전 필자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미투 고소가 법적 구성요건에 부족함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상한 고소일 가능성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있다는 글을 게재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민단체가 이를 고소하였고, 김재련 변호사측은 “이를 2차 가해행위”라고 공허한 주장만 늘어놓을 뿐 구체적으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채 침묵 모드로 접어들고 말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수사결과의 내용만으로는 “상급자와 부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관용의 한계 속 행위”로 판단될 뿐 “상급자에 의한 부하 여직원에 대한 성추행이나 성희롱으로 판단”될 만한 행위로는 아무리 옹졸한 시선으로 보더라도 판단되지 않는다.

최근 “여성의 미투운동에 대한 합리적 판단”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남성사회는 물론이고 여성계에서도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경향신문 강진구 기자의 “박재동 화백에 대한 가짜 미투 사건 고발 기사” 및 서울신문 곽병찬(전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칼럼 “광기, 미투를 ‘조롱’에 가두고 있다”라는 두 칼럼이 문제의 발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전자는 미투 가해자로 내몰려 사회적 매장을 당한 박재동 화백으로부터 미투를 당했다는 피해 여성이 “두 차례에 걸쳐 박재동 화백에게 주례를 부탁”했다는 것은 “미투 피해자의 정상적 행위”로 볼 수 없다며,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박재동 화백의 가해행위를 인정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에 대해 후배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를 2차가해자라며 징계해야 한다는 사내 여론이 형성됨으로써 “후배 권력”이라는 신조어가 발생하기까지 하고 있다. 후자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 대한 고소인에 대해 여태 현출된 증거들만으로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미투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니 김재련 변호사 뒤에 숨지 말고 고소인이 직접 나서서 사실관계를 분명하게 하여 합리적 의심을 잠재울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글이다. 두 글 다 모두 인터넷 판에 게재되었을 뿐 종이신문에는 게재되지 않았다가 사내 검열에 의해 독자들의 접근이 곤란하게 되어 있다.

미투 운동은 “여성의 말 한 마디에 남성의 운명”이 걸리는 사건으로 무한 질주해 왔다. 그 이전 사회적 관행(?)으로 허용되던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무례와 불법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는 많은 남성들이 미투 가해자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호감과 비호감의 한계”는 참으로 애매하다. 이를 단지 “여성의 주관적 판단”과 남성의 “성 인지성 부족”으로 단죄하기에는 그 경계 확정이 너무 일방적이다. 그런데 박원순 시장에 대한 고소인의 고발은 그러한 한계를 새롭게 정립하기에 적절(?)한 한계상황으로 판단된다. 이 기회에 미투 운동의 한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기준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보인다.

지금 우리는 “17년의 터널”을 걷고 있다. 새로운 기준이 정립됨으로써 향후 행동의 기준이 마련될 수만 있다면 이 “불확정 터널”은 관용과 옹졸의 경계를 새롭게 정립할 것이다. 시끄러운 세상이지만 “음모의 유령”은 제거되어야 한다. 석녀와 석남의 세상은 죽은 사회이다. 우리 모두 살아 활기차게 웃고 떠들며, 물난리 피해를 하루 속히 복구할 수 있도록 힘을...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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