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대한민국 미투 운동의 새로운 전환점, 박원순 전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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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대한민국 미투 운동의 새로운 전환점, 박원순 전 서울시장
  • 오시영
  • 승인 2020.07.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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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오시영</strong>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세상은, 인재와 천재가 뒤얽혀 혼란스럽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러한 혼란이 가중되면 가중되었지 가벼워질 수 없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다. 합종연횡의 거미줄 구조가 현대 통신망을 통해 더욱 얽히고설켜 세상 신경줄을 건드리고 있다. 증거재판주의는 주장과 변론의 중복지점에서 성립한 사실관계만을 전제로 한다. 필자는 대학에서 수십 년 간 소송법상의 증거재판주의를 십자가 구조로 강의하여 왔다. 필자는 변론에 관한 강의 도중 칠판에 커다란 형틀 모양의 십자가를 그려 놓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자주 던지고는 하였다. 변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변론을 놓고 강학상 주어진 모범답안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의견을 개진한다. 소송법학자인 필자가 생각하는 변론은 십자가를 등에 진 예수의 고난의 과정이다. 다시 말해 변론은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청년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처럼 변호사로서, 소송대리인으로서 주장하는 수평 방향증명하는 수직 방향의 교차점에서 승패가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강의 기법이다.

변론은 십자가이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했던 예수처럼 그 길을 완성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것처럼 지난한 일이다. 그래서 타인의 사건을 의뢰받은 변호사로서는 그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십자가 위의 예수처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각인시켜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위와 같이 변론은 십자가의 길임을 강조하여 왔다. 변호사가 자신이 수임한 사건에서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장하는 것이다. 주장하지 않으면 그런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판사로서도 당사자가 어떤 권리를 구제받거나 처벌받게 되는지를 알 수 없기에 주장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판사는 당사자나 변호사가 어떠한 주장을 하더라도, 일단 그 주장은 믿지 않는다.”라는 진실 제로상태에서 출발한다. 즉 주장은 거짓말일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은 사실의 허위 조작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주장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만일 주장밖에 없는데 이를 믿으면 그 판사는 상대방이나 그 누군가로부터 뇌물을 받았거나, 상대방을 이기게 해 주려고 아예 작정을 한 아주 나쁜 판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사자나 변호사의 주장이 있게 되면 판사는 객관적 증거를 요구하게 된다. 주장과 증거가 일치해야만, 다시 말해 주관적 주장과 객관적 증거가 일치해야만 비로소 하나의 사실을 사실로써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경험이 많은 법조인들은 그러한 주장과 증거의 교합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사건 처리 과정에서 상대방의 공격과 방어가 그러한 논리적 구조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그런 구조적 구성 위에서 상대방의 공격이나 방어가 있게 되면 강적을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교합이 느슨하면 실력이 형편없는 상대방을 만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모든 재판은 하늘이 알고 있는 진실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 모두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재판 절차는 공격과 방어라는 2당사자대립구조 속에서 어느 쪽이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부를 합리적으로 설득해 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심급에 따라 동일한 사안에 대한 판결 결과가 달리 나올 수도 있다. 결국 실력 있는 변호사란 이러한 변론주의 원칙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변호사를 말한다. 물론 간혹 가다 보면 일부 전관예우를 받거나 재판부와의 호불호에 의해 부정직한 재판이 자행되는 경우를 완전 배제할 수는 없지만(에고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하여튼 원칙은 변론주의 원칙에 충실한 자가 소송에서 승소하게 되어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미투 피해자라고 자칭하는 이의 고소사건에 대한 조사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살아 있는 자칭 피해자는 여전히 할 말이 많다. 이틀 전 자칭 피해자의 형사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와 일부 여성단체가 합동으로 2차 기자회견을 열었다. 첫 번째 기자회견이 있었을 때 법률가인 필자로서는 뭔가 이상하다라는 느낌이 강했었는데, 두 번째 기자회견을 보고서는 정말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주 칼럼에서 필자가 이 부분을 다루면서도 피해자를 피해자라 칭하지 않고 객관적 용어인 고소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데 2차 기자회견을 지켜보면서 적어도 고소인의 변호사가 중심이 되어 개최한 기자회견이라면 증거재판주의의 기본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장과 증거의 교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기자회견이어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기자회견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기자회견 이후 필자가 느꼈던 것과 같은 뭔가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받은 이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여론은 1차 기자회견 내용 과정에서 스모킹 건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객관적 증거가 제시되지 않음에 따라 과연 이러한 정도를 미투 피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반대 여론이 형성되어 고소인에게 역풍이 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황한 고소인측에서는 이를 “2차 가해라는 이름으로 막으려 하였으나, 그러한 “2차 가해라는 겁박성 차단행위가 여론의 역풍 앞에서 오히려 기름 붓는 역할을 해버린 부작용으로 나타나버렸다. 이는 1차 기자회견에서 희미한 주장만이 존재할 뿐 명확한 증거의 제시가 결여되어 사실의 객관화 입증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 이에 당황한 고소인의 변호사는 다시 일부 여성단체와 함께 2차 기자회견을 개최하였으나, 2차 기자회견은 자신들 주장의 허점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1차 기자회견의 보완을 통해 자신들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1차 기자회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더욱 키워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고 보인다. 여기에도 집단지성이 작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2차 기자회견의 강조점이 자칭 미투 피해자에 대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미투 가해행위에 대한 주장과 증명에 모아지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2차 가해행위라 정의한 후 이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방어선 구축 및 다른 서울시 공무원들이 고소인의 미투 항의 접수 후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에 대한 처벌 요구, 수사기관에 대한 고소 후 고소사실의 불법유출을 전제한 유출자 색출 및 그들에 대한 처벌 요구 등 사건의 본질을 벗어난 내용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하였다는 당초의 주장 대신 그 이후 일어난 후발적 행위들에 대한 방어 내지 차단을 의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지는 기행적 기자회견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성추행이란 무엇인가? 우리 대법원 판례는 성추행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로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정의한 후, 구체적으로 해당되는지 여부는 상대방의 의사, 성별, 연령, 행위자와 상대방의 이전부터의 관계,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과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 판례가 의미하는 것은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지라도 객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느낄 만한 행위가 아니라면 강제추행이 불성립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한편 성추행 관련 범죄는 모두 고의범이다. 다시 말해 성추행범죄는 과실에 의해 저질러 질 수는 없고, “성추행의 고의를 가진 경우에만 성립하는 범죄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대법원은 피해자의 주관적 의사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는데, 가령 피해자의 주관적 의사 또는 객관적 상황에 의해 성추행이라 인식되더라도 가해자에게 성추행의 고의가 없는 경우라면 고의범 처벌 규정만 존재하는 성추행범죄가 성립하지 못 한다는 결론에 배치되어 부당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일 그러한 상황에 이른다면 가해자라 지칭되는 자는 성추행의 고의가 전혀 없었는데도 성추행범으로 처벌받게 되어 고의범 처벌 규정의 한계를 일탈하는 해석론적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우리 대법원 판례는 그러한 고의성의 판단 기준행위자의 순수한 내심의 의사에 맡겨 놓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 성별, 연령, 행위자와 상대방의 이전부터의 관계,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과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고 하여 고의성을 객관화시키려고 있다. 그러한 판단 과정에서 행위자의 주관적 고의성과 객관적 고의성의 갭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성 인지성내지 성 감수성이라는 불명확한 개념을 개입시키고 있다.

현대 사회는 성음란물의 홍수시대이다. 불과 삼사십년전만 해도 칠거지악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회질서의 기준으로 언급되었고, “이혼 전력이 엄청난 핸디캡으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상은 급변하였고, 그러한 주장은 구태가 되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높아지고 경제적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여권이 급격하게 신장되었고, 컴퓨터로 상징되는 업무의 초첨단화와 각종 기계 장비의 발달로 인한 남성 노동력의 왜소화 과정에서 오히려 여성이 주도하는 사회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혁 과정에서 여성의 성적 피해로 상징되는 미투 운동또한 당초의 사회적 약자 보호 차원에서 이제는 여성이 이를 하나의 사회적 무기로 사용하여 남성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는 한번 되돌아볼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인다.

물론 수많은 여성이 아직도 사회적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일부 남성들에 의해 성추행 등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랜 대학 교수생활을 통해 여학생들의 파워가 이미 남학생을 능가하고 있음을 수없이 경험하였고, 남학생들이 여학생에게 쩔쩔매며 끌려 다니는 현상을 수없이 목도하여 왔다. 이미 세상은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 여성의 말 한 마디에 천지가 개벽하고 남성들이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강제적 성추행과 자발적 성친밀성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취급하는 성숙한 사회로 진입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 사회는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련하여 과도기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랜 유교적 전통 속에서 머리 속에 유전자로 남아 있는 인식은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는데, 행동은 서구적 교육과 문화의 이입으로 완전 개방되어 있는 이율배반적 모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의 행위는 현대적 교육을 받은 세계인으로서의 행동양식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다시 말해 성적 자유를 구가하면서, 타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의 행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교적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도덕적 비난을 가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성적 자유에 대해서는 자유방임을, 반대로 타인의 성적 자유는 철저히 억압하는 이중적 모순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현 모습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바로 봄의 인식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하나의 단어로 회자되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과 타인의 행위에 대한 비난이 혼재되어 혼란스러운 상태를 우리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박원순 시장의 여비서에 대해 어떠한 행위를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발표된 사실 이외에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고소인측의 1,2차 기자회견을 통해 주장은 있으나 객관적 증거가 부족한 상태임을 판단할 수는 있다. 구체적 행위는 육하원칙에 의해 주장되고, 증거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특히 변호사가 발표자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변호사는 뜬구름을 쫓는 자가 아니라 구체적 사실을 입증하며 한 뜸 한 뜸 손뜨개질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까닭에 고소인측 김재련 변호사의 발표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고소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만은 밝혀졌으면 한다. 사회적 건강성 회복을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다. 인재(人災)와 천재(天災)가 혼재된 대한민국 7월의 마지막 주, 세상은 참으로 뜨겁다. 장마 속에서 날씨가 무척 후덥지근하다. 슈퍼맨 같은 인재, 천재가 나타나 세상을 한 번 뒤집어엎었으면 좋겠다. 슈퍼맨!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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