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한만호 비망록, 썩은 내 나는 검찰, 정호정의 “그 날의 연지동 풍경”
상태바
오시영의 세상의 창-한만호 비망록, 썩은 내 나는 검찰, 정호정의 “그 날의 연지동 풍경”
  • 오시영
  • 승인 2020.05.22 1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신은 존재한다. 많은 이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주장하지만, 신은 결단코 존재한다. 왜 신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심판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간으로 존재한다. 심판하기 위해 시간으로 존재하는 신은 모든 생명체를 심판한다. 시간 앞에서 심판을 피할 자는 이 세상에 없다. 그 누구도 시간의 심판을 피해 갈 수 없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신이 상 주지 않는다고, 악하게 사는 이들조차 벌하지 않는다고 많은 이들이 불평한다. “저렇게 악한 놈들을 살려두다니, 아니 호의호식하며 잘 먹고 잘살게 하다니, 신이 없는 것이 분명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이들이 많다. 우리 모두 악한 자들은 처벌받아야 하고, 선한 이들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악한 이들에 의해 휘둘림을 받는 선한 이들의 고통을 바라만 보는 신이란 우리에게 필요 없어 라고 외치기도 한다. 하지만 신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심판한다. 그대 입을 통해 악한 이들을 이미 심판하시잖는가!

정치검찰의 악행이 “한만호 비망록”을 통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교도소에 수감돼 기록을 남기는 이들은 그게 마지막 저항이다. 목숨을 걸고 비망록을 작성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옥중에서 쓰인 글은 그 글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힘이 강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사상을 체계화시켰다고 평가받는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중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로마 감옥에서 썼다. 네 편의 성경은 어떻게 초대교회를 깨끗하고 성스러운 장소로 세워나갈 것인지,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인지, 어떻게 교인 상호 간에 용서하고 화해하며 평화를 이루어나갈 것인지 등등 기독교의 기초이론을 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 십자가 사후 우왕좌왕하던 초대 기독교도들이 교회를 체계화함으로써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옥중에서 쓰인 글은 그 힘이 강하다. 진실일 개연성이 높다.

건축분양사업을 하던 한만호 씨는 사업 도중 자금 회전이 일시 막혀 분양사기로 고소되어 구속되었다. 자신의 주소지인 일산 출신 국회의원이던 한명숙 전 총리를 표적 삼아 그의 서울시장 당선을 막기 위해 한만호 씨가 9억 원의 뇌물을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주었다고 정치검찰이 허위 자백할 것을 강요하여, 한명숙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지 못하게 협조하면 구속 기간을 단축해 출소시켜 줄 뿐만 아니라 출소 후 사업에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하여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특수부 검찰 수사에서 허위 진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일흔 세 차례에 걸쳐 교도소에서 검찰에 소환되어 자신의 허위진술이 진실인 것처럼 법정에서 시연될 수 있도록 “모의 질문지와 모범 답안지”를 작성한 후 “허위 증언 연습”을 하였다는 것이다. 진실인 사실은 연습하지 않고도 사실대로 증언할 수 있지만, 거짓인 사실은 연습하고서도 연습한 대로 진술하지 못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연습을 해도 자주 틀릴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수십 차례 검찰에 불려 나가 연습에 연습하였다는 것이다. 73번 검찰에 소환되었지만 단지 조서가 작성된 것은 다섯 차례에 불과하다. 그럼 나머지 68번은 조서 작성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소환되어 검찰청에 출석하였다는 반증이 된다. 그 많은 시간 동안 수사도 안 하고 무엇을 했을까. 그러니 그때 수사를 받지 않고 검찰과 거짓 증언 연습을 반복하였다는 한만호 씨의 비망록 고백이 신뢰를 얻는 이유가 된다.

한만호 씨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그렇게 검찰이 시키는 대로 거짓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빗대어 “검찰의 개가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검찰에서 짜 준 각본대로 진술하면 “검사가 맛있는 음식을 사 주고 그렇지 않으면 혼이 났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나 심리적 표현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내용이다. 결국, 그는 검찰의 진술 강요대로 9억 원의 뇌물을 주었다고 진술조서에 진술 날인을 하였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서는 자신의 검찰 진술을 번복하며 9억 원의 뇌물을 준 사실이 없다고 진실을 밝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신뢰 문제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인데, 그의 검찰 진술보다는 법정 증언이 훨씬 더 신뢰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가 법정에서 번복 증언을 해가면서까지, 검찰에서 한 증언을 뒤집어 얻을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검찰에서 한 진술 번복을 통해 한명숙 전 총리 측으로부터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한명숙 전 총리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판이 진행되던 2010년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정권의 검찰 수사에 모욕감과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 해였고, 당시 친노무현 세력은 자신을 폐족이라 칭하던 상태였던 데다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박근혜 의원이 여론몰이하고 있던 때였고 야당에는 별로 내세울 만한 후보가 없었는데, 만일 한명숙 전 총리가 서울시장에 당선된다면 대권후보로 도약할 수 있는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싹을 잘라야 할 정치적 음모가 자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당선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고(당시 여론은 오세훈 후보에 거의 20% 가까이 밀리고 있었다), 건설사업 중 사기분양으로 구속 중이던 한만호 씨로서는 검찰의 회유대로 빨리 석방되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은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던 때여서 웬만하면 검찰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백배 이익이었던 상황이었다.

검찰의 회유대로 거짓 증언을 실행했다면 그는 조기 출소하여 망했던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음에도, 당시 아무런 힘이 없던 한명숙 전 총리 편을 들어 뇌물을 준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고(오히려 당시 여당 실세 중 한 명이던 현직 도지사에게 6억 원의 뇌물을 주었다고 자백하고 있다. 그가 한명숙 전 총리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자백하여 처벌을 두려워했다면 위 도지사에게 6억 원을 뇌물로 준 자백도 마찬가지이다), 그 증언으로 위증죄로 기소되어 다시 3년의 징역형을 살아야 할 모험(?)을 감행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한명숙 전 총리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라는 증언이 “뇌물을 주었다”는 검찰 참고인진술조서보다 훨씬 더 울림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증언을 청취한 1심 재판부는 23차례의 공판을 걸쳐 사건을 자세히 분석한 후 한명숙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하지만 정형식 판사가 중심이 된 2심 재판부는 단 네 차례의 공판을 형식적으로 진행한 후, 1심 판결을 뒤집고 한명숙 총리에게 2년의 징역형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최소한 정상적인 2심 재판부라면 검찰의 진술조서 기재 내용과 직접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이 서로 불일치할 경우 직접 증인을 소환하여 법정에서 증언을 청취하고 무죄판결을 선고한 1심 재판부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상례이다. 반대로 따르지 않으려면 증인을 재소환하여 다시 한 번쯤 어떤 진술이 맞는지를 확인한 후 1심 판결과 달리 유죄를 선고하는 심증 형성 절차를 밟은 후 유죄판결을 선고하는 것이 “직접심리주의”의 본질이고, “공판중심주의”에 충실한 재판이다.

그런데 정형식 2심 재판부는 그러한 절차 없이, 다시 말해 증인 한만호 씨를 소환하여 재차 확인하는 절차 없이 새로운 증거가 제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짜고짜 “무죄를 유죄로 뒤집는 기막힌 판결”을 선고하는 무모함을 보였다. 그러니 재판을 받던 한명숙 전 총리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사실을 접하게 된 한만호 씨는 옥중 비망록을 써서 역사적 증거를 남겨야겠다는 위험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추론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 의문이 남는 것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상고법원의 설치 안”과 관련하여 대통령과 면접하는 자리에서 “한명숙 전 총리 재판 건”을 사법부의 치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처음에 “한명숙 전 총리 재판 건”이 왜 상고법원 설치를 요구하는 대통령과의 면담 자리에서 사법부의 치적으로 거론되는지 무척 의아하였는데, 한만호 비망록이 공개됨으로써 “음험한 기획 범죄 조작의 혐의”가 검찰, 사법부 내에서 관통하고 있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검찰은 한만호 씨가 증언 번복 이후 교도소(사기분양으로 형 집행 중)에서 비망록을 쓴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비망록을 그의 출소 사흘 전인 2011. 6. 9. 압수하였다. 그가 비망록을 가지고 출소하게 되면 파괴력이 만만치 않다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비망록은 한명숙 재판 진행 직후부터 쓰인 것이어서 기억이 생생할 때 작성되었기 때문에 진실일 개연성이 아주 높다. 사건 직후 쓰였기 때문이다. 결국, 비망록을 읽은 검찰은 한만호 씨를 계속 풀어놓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다시 위증죄로 기소하여 3년형이라는 상당히 장기형을 선고받도록 하였다. 그의 비망록 전파를 차단하기 위하여 이를 압수한 검찰은 어리석게도 그 비망록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한만호 위증죄의 증거”로 제출하여 그를 위증죄로 사회와 격리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당시 재판부가 변호인 측의 비망록 발췌본의 신빙성 탄핵성 반론제기에 따라 “비망록 전부의 법정 제출”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한만호 비망록 전체가 법정 증거로 채택되어 지금까지 보관되어 오다가, 세상이 바뀜에 따라 탐사보도를 통해 비망록 전문이 10년 만에 공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검찰은 10년이라는 시간의 신이 단죄의 칼을 들이대자 검찰이 기획범죄조작을 한 게 아니라고 강변하며, 위증죄로 처벌받은 한만호 씨가 자신을 변명하고 검찰을 욕보이기 위해 거짓 비망록을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만호 씨가 위증죄 형량을 마치고 출소 후 화병으로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함으로써 더는 한만호 씨의 진실한 마음을 열어볼 수 없지만, 합리적 추론은 가능하다고 할 것인바, 그 비망록 기재의 진실성은 대단히 높아 보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인간이 거대 국가권력의 횡포 앞에서 느꼈을 캄캄한 막막함이, 절망감이 절절히 느껴져 오는 비망록이다. 지난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역사재조명”이 있었다. 감추어졌던 진실들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전두환 군부독재세력의 무자비한 총기 난사에 의한 죄 없는 백성들의 처참한 죽음, 그 고통은 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75만 광주시민 중 30만 이상이 참여하였던 민주화운동, 바로 눈앞에서 부모·형제가 살해당하는 처절한 고통을 감내하였던 그들을 향해 아직도 폭도나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들의 소행이라고 막말을 늘어놓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시간의 신은 이번 40주년 기념행사들을 통해, “아, 대한민국이 40년 만에 완전히 바뀌었구나!”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아직 세상이 바뀐 줄 모르고 사는 저 한만호 비망록에 나오는 정치검찰들, 그리고 지금도 표창장 하나를 가지고 한 피고인 가족을 쥐 잡듯이 뒤지며 검찰 개혁을 막아보려 몸부림치고 있는 정치검찰들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의 신이 지켜보다가 단죄할 것이다. 시간의 신은 그래서 무섭다. 그래서 강하다.

노시인 정호정 선생님의 “그날의 연지동 풍경-4.19, 강아지”를 읽으며 이번 주 글을 맺는다. “아이와 나는 한달음에 서면시장으로 달려갔다 개장수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긴 줄째 없어진 강아지, 개천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져 찾아보기로 했다 강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강아지의 흑수정 눈만 어른거렸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서면 로터리, 경찰서 건너편에서 웅성대는 사람들, 차에 실려 온 부상자들이 들것에 실려 꾸역꾸역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여기저기에서 총소리가 들려와 몸서리치며 집으로 왔다// 해거름이나 되어 아이가 강아지를 데리고 돌아왔다 총소리며 다친 사람, 피 흘리는 사람,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구경할 것이 너무나 많았단다// 총소리가 하나도 무섭지 않은 아이, 死地에서 살아온 줄도 모른 강아지를 번갈아 껴안아 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전문, 시집 ‘십 리 벚꽃 길을 가다’에 수록, 수동예림, 2020 간). 419와 518은 다른 듯 같다. 사람과 개가 등장한다. 착한 아이와 악한 어른이 공존하는 세상, 개만도 못한 인간들도 살아 있다. 강아지는 결코 개가 아니다. 잃어버렸던 강아지를 찾아 안고 우는 마음도 419, 518의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정치검찰, 신은 시간으로 존재하며 심판할 것이다. 시간의 신 앞에서 심판받지 않을 자, 누구인가, 나와 보라.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