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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PSAT 언어논리 알고리즘 (12)-내용이해-지시어와 접속어의 활용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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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PSAT 언어논리 알고리즘 (12)-내용이해-지시어와 접속어의 활용 예시
  • 이유진
  • 승인 2020.04.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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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박문각남부고시학원

안녕하세요, <국어 독해알고리즘>의 저자 이유진입니다. 수능에서 공무원 수험생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은 <국어 독해알고리즘>에 이어, <PSAT 언어논리 알고리즘>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출간에 앞서, 앞으로 이 칼럼을 통해 ‘가장 효율적이면서 이상적인 언어논리 접근과 훈련’에 대한 저의 고민과 판단을 공유하려 합니다.
제 커뮤니티(http://cafe.daum.net/naraeyoujin)에 시중 출간 전까지 초벌 원고를 공개하고 여러분의 피드백을 받을 생각이니 적극적인 참여 부탁드려요.
 

5PSAT 20164책형 25> 다음 글에서 추론할 수 없는 것은?

삼국유사는 신라 전성시대의 경주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금입택(金入宅)의 명칭 39개를 나열하고 있다. 신라의 전성시대란 일반적으로 상대, 중대, 하대 중 삼국 통일 이후 100여 년 간의 중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나, 경주가 왕도로서 가장 발전했던 시기는 하대 헌강왕 대이다. 39개의 금입택이 있었던 시기도 이때이다. 그런데 경덕왕 13년에 황룡사종을 만든 장인이 금입택 가운데 하나인 이상택(里上宅)의 하인이었으므로, 중대의 최전성기에 이미 금입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금입택은 적어도 중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하대에 이르면 경주에 대략 40여 택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이 금입택 가운데 저명한 것만을 기록한 것이므로, 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쇠드리네또는 금드리네의 직역어인 금입택은 금이나 은 또는 도금으로 서까래나 문틀 주위를 장식한 호화주택이다. 지붕은 주로 막새기와를 덮었으며, 지붕의 합각 부분에는 물고기나 화초 모양의 장식을 했다. 김유신 가문이라든가 집사부 시중을 역임한 김양종의 가문, 경명왕의 왕비를 배출한 장사택 가문 등 진골 중에서도 왕권에 비견되는 막대한 권력과 재력을 누리던 소수의 유력한 집안만이 이러한 가옥을 가질 수 있었다.

금입택은 평지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경주에서는 알천이 자주 범람하였으므로 대저택을 만들기에 평지는 부적절했다. 따라서 귀족들의 금입택은 월성 건너편의 기슭에 주로 조성되었는데, 이 일대는 풍광이 매우 아름다워 주택지로서 최적이었다. 또한 남산의 산록 및 북천의 북쪽 기슭에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지역은 하천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지대라서 주택지로 적합하였다.

또한 지택(池宅), 천택(泉宅), 정상택(井上宅), 수망택(水望宅) 등 이름 가운데 ()’, ‘()’, ‘()’, ‘()’ 등 물과 관계있는 문자가 보이는 금입택이 많다. 이러한 금입택은 물을 이용한 연못이나 우물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금입택 중 명남택(椧南宅)에서 보이는 ()’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수광, 이규경 등이 증명한 것처럼, 우리 고유의 글자로 대나무 혹은 돌을 길게 이어 물을 끌어 쓰거나 버리는 데 이용하는 대홈통의 뜻을 갖고 있다. 이러한 수리시설은 오늘날 산지에서 이용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사찰이나 궁궐의 조경에도 이용되었다. 명남택은 이러한 수리시설을 갖추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한편 금입택 중 사절유택(四節遊宅)과 구지택(仇知宅)은 별장이었다.

월성 건너편의 기슭은 하천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지대였으므로 주택지로서 적합하였다. (X)

월성건너편의 기슭은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서 주택지로 최적이었다고 하였고, 남산의 산록 및 북천의 북쪽 기슭은 하천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지대라서 주택지로 적합하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또한이라는 순접 병렬의 접속어 앞뒤를 뭉뚱그려 읽고, 뒤 문장의 이 지역은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경우 선지에 대해 잘못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유진의 PSAT 언어논리 알고리즘 (11) 지시어 접속어의 활용 참고

관계

기호

대립(역접)/전환

인과/귀결

원인

(근거) (결론)

결과

(결론) (근거)

>

아래의 지문은 위에 제시된 펜터치 기호를 종합적으로 연습해 볼 수 있는 좋은 지문입니다.

민간경력자 5PSAT 20172>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원래 북아메리카에는 100만 명 가량의 원주민밖에 없었다고 배웠다. 이렇게 적은 수라면 거의 빈 대륙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백인들의 아메리카 침략은 정당해 보였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과 미국의 해안 지방을 처음 밟은 유럽 탐험가들의 기록을 자세히 검토한 결과 원주민들이 처음에는 수천 만 명에 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메리카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 한두 세기에 걸쳐 원주민 인구는 최대 95%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유럽의 총칼에 의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유럽에서 온 전염병에 의해 목숨을 잃은 원주민 수가 훨씬 많았다. 이 전염병은 대부분의 원주민들과 그 지도자들을 죽이고 생존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림으로써 그들의 저항을 약화시켰다. > 예를 들자면 (1519년에 코르테스는 인구 수천만의 아스텍 제국을 침탈하기 위해 멕시코 해안에 상륙했다. 코르테스는 단 600명의 스페인 병사를 이끌고 아스텍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을 무모하게 공격했지만 병력의 3분의 2만 잃고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스페인의 군사적 강점과 아스텍족의 어리숙함이 함께 작용했다. 코르테스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 아스텍인들은 더이상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았고 몹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도 스페인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천연두 때문이었다. 이 병1520년에 스페인령 쿠바에서 감염된 한 노예와 더불어 멕시코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유행병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아스텍족을 몰살시켰으며 거기에는 쿠이틀라우악 아스텍 황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수수께끼의 질병은 마치 스페인인들이 무적임을 알리려는 듯 스페인인은 내버려두고 원주민만 골라 죽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약 2,000만에 달했던 멕시코 원주민 인구가 1618년 에는 약 160만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전염병에 대한 유럽인의 면역력은 그들의 호전성을 높여주었다.

스페인의 군사력이 아스텍 제국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주된 원인은 전염병 감염이다.

유럽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면역력 차이가 스페인과 아스텍 제국의 1519년 전투 양상을 변화시켰다.

코르테스가 다시 침입했을 때 아스텍인들이 격렬히 저항한 것은 아스텍 황제의 죽음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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