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장순금 시인의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 윤석열 총장의 거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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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장순금 시인의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 윤석열 총장의 거취
  • 오시영
  • 승인 2020.04.1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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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오시영</strong>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일부는 일부이면서 전부이다. 전부는 전부이면서 또 일부이다. 일부와 전부는 서로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전부다. 전부가 똑 같은 일부의 모음일 수도 있고, 모두 다른 일부의 모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일부도 전부의 같은 조각일 수도 있고, 모두 다른 조각일 수도 있다. 퍼즐은 조각이 모여 전부를 이루고, 전부가 흩어져 조각이 된다. 퍼즐을 맞추는 것은 마지막 한 조각에서 승부가 난다. 그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마지막 공간을 채우는 순간 퍼즐은 전부가 되고, 전부가 되는 순간 모든 일부는 살아 제 기능을 한다. 일부는 일부이면서 전부이고, 전부는 전부이면서 또 일부인 까닭이다.

장순금 시인의 “얼마나 맑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라는 시를 본다. “할머니는 목욕탕 샤워기 앞에서 몸을 수십 번 헹구고 또 헹궈낸다/ 몸뚱어리에서 먼지와 오물이 쉴 새 없이 묻어나오는지/ 두 시간째 샤워기 앞이다// 땡볕에 무방비로 삐져나온 살 속으로/ 흙바람 욕설 눈총도 박혔는지, 악취도 몸속을 뚫고 들어왔는지/ 버려진 시간들이 할머니 발바닥에 달라붙어/ 세척을 강요하는가 보다// 할머니는 몸을 바꾸고 싶었을까, 물로 수백 번 씻어내면// 오늘의 골판지 빈병 리어카가 내일은 가벼운 악보로 바뀔지 몰라/ 햇살이 몸 덥히는 따끈한 생이 아침 밥상에 오를지도,// 날마다/ 내일은 향긋한 몸으로 햇살을 주워야지, 깨끗한 신발로 순정한 시간을 걸어야지/ 갓 나온 싹을 주워 서쪽에 버려진 봄을 사야지// 한 번쯤은/ 비탈진 척추를 볕에 세우고 고른 길 파랗게 오르고 싶었을까// 할머니는 등껍질에 수백 번 물을 끼얹으며/ 남루한 생을 씻고 또 씻고,” (전문, 시집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에 수록, 시산맥, 2020년 간).

거울 앞에 한 인간, 아니 샤워기 앞에 선 한 인간을 본다. 한 차원 승화된 인간이다. 거울 앞 인간은 자기 잘난 부분이 어디인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요모조모 뜯어보며 스스로 만족해한다. 제 모습 속 짚신 한 짝을 찾는 심정이 거울 앞 한 인간에게는 감춰져 있다. 거울 앞에 서면 감춰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거울의 역할은 거기까지일 뿐이다. 씻기지 않는다. 변화하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 비칠 뿐이다. 위 시를 읽는 순간 장순금 시인의 시적 본질 찾기가 순정의 단계로 접어듦이 느껴졌다. 50년 넘게 시를 써온 시력(詩力)이 드디어 시인의 이름처럼 순금이 되어있다. 샤워기 앞에 선 할머니라니….

한 인간이 할아버지가 된다는 것,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 한 인간의 역사가 순전히 기록되었음을 상징한다. 역사라는 것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고, 가필하고 싶어도 가필되지 않는 삶의 기록 그 자체이다. 더러는 역사를 왜곡하거나 미화하려 헛된 시도를 하는 이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헛된 시도마저 역사로 기록되어 그 인간을 더 추하게 만들 뿐이다. 샤워기 앞에서 수백 번 자신을 씻고 또 씻는 할머니는 할머니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를 하고 있다. 거울 앞에 선 것보다 샤워기 앞에 선 한 인간이 더 위대한 까닭은 자신의 허물을 씻겠다는 그 순정(純正)을 향한 위대한 결단과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시를 따라가 본다. “할머니는 목욕탕 샤워기 앞에서 몸을 수십 번 헹구고 또 헹궈낸다/ 몸뚱어리에서 먼지와 오물이 쉴 새 없이 묻어나오는지/ 두 시간째 샤워기 앞이다”. 첫 연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독자가 무심히 보아 온 목욕하는 한 할머니의 모습을 관찰자의 시각으로 접근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반성자의 시각을 갖는다. 그러면서 1연 후반부, 샤워기 앞에서 쉴 새 없이 깨끗한 물로 몸뚱어리를 씻어내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땡볕에 무방비로 삐져나온 살 속으로/ 흙바람 욕설 눈총도 박혔는지, 악취도 몸속을 뚫고 들어왔는지/ 버려진 시간들이 할머니 발바닥에 달라붙어/ 세척을 강요하는가 보다”라며 씻고 또 씻는 할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2연에서 “할머니는 몸을 바꾸고 싶었을까, 물로 수백 번 씻어내면” 하고 할머니의 염원을 읽어내려 간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3연에 이르러 “오늘의 골판지 빈병 리어카가 내일은 가벼운 악보로 바뀔지 몰라/ 햇살이 몸 덥히는 따끈한 생이 아침 밥상에 오를지도,”라며 살아온 삶에 대한 회한과 함께 얼마 남지 않는 삶의 희망을 꿈꾸는 어린 소녀로 환생한다. 골판지 빈병 리어카의 초라한 삶이 가벼운 악보로 바뀌는 내일, 봄 햇살로 따끈해진 삶이 맛있는 아침 밥상처럼 차려질지도 모를 내일, 아니 오늘을 꿈꾼다.

그러면서 시인은 4연에 이르러 “날마다/ 내일은 향긋한 몸으로 햇살을 주워야지, 깨끗한 신발로 순정한 시간을 걸어야지/ 갓 나온 싹을 주워 서쪽에 버려진 봄을 사야지”라며, 한순간의 결단이 남은 생의 결단으로 지속할 것임을 다짐하는 의지를 다진다. 삶의 관점이 샤워기 앞에서 바뀌어 지금까지 살아온 어제까지의 후회와 좌절에서 벗어나 의지에 따라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한 의지를 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5연에서 “한 번쯤은/ 비탈진 척추를 볕에 세우고 고른 길 파랗게 오르고 싶었을까”하며 할머니의 의지에 공감하며, 시인 스스로도 그 의지의 공감대에 편입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할머니는 등껍질에 수백 번 물을 끼얹으며/ 남루한 생을 씻고 또 씻고,”라며, 불태워진 의지를 구체화한다.

우리는 한순간을 참 맑고 깨끗하게 살아야겠다며, 도덕적 순수함을 지키고, 의지적 정진을 거듭하며,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고 교육받아왔던 “순정한 역사”를 스스로의 삶에 기록하고자 애를 쓰며 산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실천되지 못하고, 헛발질에 그치거나 실족하기 마련이다. 그게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장순금 시인은 저 시를 통해 그러한 삶의 악취를 씻어내고자 몸부림치는 무의식적 성찰의 시간을 우리에게 깨우친다. 저렇게 좋은 시를 만나면 필자는 작은 독자가 되어 독자가 누릴 행복을 마음껏 맛보게 된다. 시인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되고, 한 편의 시가 얼마나 커다란 정화(淨化)의 힘을 가졌는지 감탄하게 된다.

필자는 지난해 12월 6일자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제 진퇴를 결정해야”라는 본보 칼럼을 통해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윤석열 검찰총장의 자진사퇴를 처음으로 의견개진하였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 가족들에 대한 검찰권 남용 현상이 지나침을 보며 그 책임을 검찰 조직의 수장으로서 져야 한다는 법률가의 판단이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올 1월 31일자 “법무부 감찰권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표 가능성, 달의 월출과 월몰”이라는 본보 칼럼을 통해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최강욱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에 대한 피의자신문절차 한 번 없이 불구속기소하는 것에 대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이성윤 검사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으로 인사발령 난 검사들에게 별도로 지시하여 기소하도록 명령한 검찰권 남용에 대해 검찰청법 해석과 함께 사적 감정에 의한 검찰권 행사의 자의적 집행임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판단 끝에 내려진 주장이었다. 이어서 3월 20일자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윤석열 검찰총장의 퇴진 용단이 필요한 때”라는 칼럼을 통해 장모와 부인이 연관된 사문서위조 및 사기죄 등의 범죄 혐의에 대한 구체적 수사 개시와 관련하여 그동안 윤석열 총장이 주장해 온 검사동일체의 원칙(필자는 검사동일체의 원칙이 검찰청법 개정으로 소멸하였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에 비추어도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퇴진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지난 3월 말 경 윤 총장 장모가 의정부지검에서 사문서위조죄로 불구속기소되었다. 검찰은 사문서위조가 “사기범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하였음이 범죄의 본질이었음에도, 즉 사기라는 범죄수법에 사용하기 위한 도구로 사문서(예금잔고증명서)를 위조하였는데, 그리고 그 위조예금잔고증명서를 이용하여 부동산거래 성사 및 은행대출을 받은 신용의 근거로 사용하여 사기를 행하였음에도 사기죄로 기소하지 않는 특혜(?)를 베푸는 기소독점권을 남용하였다. 사기죄의 형량이 사문서위조죄보다 두 배 가량 높기 때문에, 수사결과 빼도 박도 못한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기소하지 않을 수는 없어 낮은 형량이 적용되는 사문서위조죄로만 기소하여 눈 가리고 아웅 하였다. 이런 특혜성 기소가 가능한 것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총장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 이외에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다.

결국 이러한 편법 기소 처리에 대해 일부 시민단체들이 윤석열 총장의 장모에 대해 “사기죄”로 처벌해 달라고 고발하였고, 나아가 윤석열 총장의 부인 김건희 씨에 대해서도 이미 필자가 앞서 칼럼에서 범죄 혐의가 의심된다고 주장한 바 있는 “주가조작사건”에 대한 범죄혐의가 있다며 역시 고소하였다. 결국, 다시 장모와 부인에 대한 형사고소가 이루어짐에 따라 검찰은 이를 다시 재수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는데, 여전히 윤석열 검찰총장이 총장으로 버티고 있는 한 올바른 수사가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형국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수원지검 검찰수사관이 검찰 내부망 이프로세스에 “총장의 장모와 부인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누가 수사를 하더라도 총장이 조사한 것”이라는, 그동안 윤석열 검찰총장이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끌고 와 사퇴할 것을 촉구하였다. 해당 검찰수사관은 검사동일체의 원칙에 의해 대한민국 모든 검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총장이 강조해 온 그 원칙에 의하면 “어떤 검사가 수사해도 그것은 총장이 수사한 것”이 되어 “총장이 자기 장모와 부인을 수사한 것”이 되고 말므로, 이렇게 검사(검찰총장)가 자기 가족을 수사해서는 안 되므로 사퇴하라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기술하여 올린 것이다.

그뿐 아니라 종합편성채널 채널A 이동재 기자가 윤석열 최측근이라는 모 검사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신라젠으로 상징되는 이철 대표의 대리인에게 들려주며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에 대한 가공된 범죄사실을 조작하는데 협조하라는 협박성 가짜범죄조작시도가 들통이 났고, 관련자로 지목된 모 검사장에 대한 감찰문제 및 협박죄 수사 여부가 새로운 쟁점이 되면서 윤석열 검찰총장의 존재 자체가 수사방해가 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3월 말과 4월 초를 마지노선으로 하여 가짜범죄조작결과를 보도함으로써 유시민 이사장을 가짜범죄혐의로 엮으려는 이동재 기자의 검언 유착 시도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유시민 이사장을 가짜범죄혐의로 엮어 그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확산시켜 이번 4ㆍ15총선을 뒤집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평가하고 적극적인 대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동재 기자가 언급한 것으로 알려진, 이번 총선에서 친문 세력은 완전히 몰락할 것이라는 취지의 설명과 “사실이 아니어도 좋다. 당신이 살려면 유시민에게 돈을 주었다고 해라,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라는 부분은 위와 같은 합리적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필자는 동일한 사람에 대하여 위 세 번의 칼럼으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권고한 바가 있어서 네 번째 권고하려 하지 않는다. 삼시세판으로 끝내고 싶어서 사시네판으로 가면 안 되지 않겠는가. 다만 장순금 시인의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라는 시를 들려줌으로써 “버려진 시간들이 할머니의 발바닥에 달라붙어 세척을 강요”당하고 있는 할머니의 고해성사를 통해 “몸을 수십 번 헹구고 또 헹궈내는 성찰의 시간”을 갖기를 권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야, 그 씻김굿이 완성되어야 “내일은 가벼운 악보”로 바뀔 수 있고, “햇살이 몸 덥히는 따끈한 생이 아침 밥상”에 오를지도 모르고, “내일은 향긋한 몸으로 햇살”을 주울 수가 있고, “깨끗한 신발로 순정한 시간”을 걸을 수 있는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윤석열 총장 장모의 범죄 꼬리가 너무 길었다. 검찰은 윤 총장 장모 사건을 수사하여 공동 투자한 이들을 형사처벌받게 하면서 장모만은 예외 처리해 준 수사검사들과 수사관들에 대해 수사도 하여야 한다. 직무유기이기 때문이다. 검찰의 특정인에 대한 집중적, 반복적 특혜처분이 우연인지 고의인지 밝혀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 알고 싶으면 거울이 아닌 샤워기 앞에 서라. 그리고 백 번 천 번 씻으라. 그렇다고 제대로 씻겨지겠는가마는.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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