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판장님, 사실 피고의 부모는 아직도 인정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원고쪽 변호사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휙 고개를 돌려 피고쪽 변호사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법대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재판장님, 이미 대법원까지 가서 끝난 사안입니다. 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 대리인, 오늘이 첫 변론기일인데요.” 이어서 저는 ‘무슨 재판을, 시작하자마자 결심을 하재요?’라고 할 뻔했지만, 그 뒷말은 삼키고 피고쪽 변호사를 향해 물었습니다.
“피고 대리인, 피고 부모가 인정을 못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이미 형사판결이 확정된 것을 아직 모른다는 것은 아니지요?”
“네, 형사판결은 확정되었지만, 피고 부모는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막말로 길 가던 여자를 끌고 간 거도 아니고......”
말 중간에 원고쪽 변호사의 미간이 확 찌그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황급히 피고 변호사의 말허리를 자르고 제지를 했습니다.
“피고 대리인, 그래도 법정이니 말씀을 주의해 주세요. 정말 길 가던 여자를 끌고 가기라도 했으면 징역 1년 6개월로 끝났겠습니까. 변호사가 아닌 당사자들이야 법을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변호사님이 법정에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좀......”
피고 변호사는 발끈하며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둘이 사귀는 사이였고 장소도 여자 집이었습니다. 둘 다 장애도 있고 여자가 분명히 거부하지도 않은......”
“재판장님! 분명히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피고가 성폭행을 한 사안입니다.”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끼어든 원고 변호사는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런데도 피고가 반성은커녕 끝까지 부인하면서 무죄라고 주장해서 대법원까지 갔습니다. 징역 1년 6개월의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는데, 그걸 민사재판에서 다시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형사기록을 이미 증거로 전부 제출했고 더 이상 낼 것도 없습니다. 결심해 주십시오.”
하지만 피고 변호사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좀 전에 하던 말을 고집스럽게 이어갔습니다.
“재판장님, 연인사이에 둘 다 지적 장애가 있는데 여자가 명확히 거부를 하지도 않고서 나중에 고소를 해 버린 것입니다. 피고나 피고의 부모는 당시 여자가 합의하에 성행위를 해 놓고서 억울하게 누명을 씌웠다고 믿고 있습니다. 형사판결이 확정되어 어쩔 수 없이 수형생활을 하고 있지만 유죄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요? 확정판결을 재심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래서요? 피고 대리인?”에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자 피고 변호사는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형사판결이 확정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피고의 억울한 사정을 적어도 민사재판에서 위자료의 액수에 참작해 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형사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다고는 하나, 말씀드린 사정 등을 고려하면 민사상 손해배상의 위자료는 없거나 극히 적어야 할 것입니다.”
피고 변호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고 변호사는 다시 단호한 어조로 말을 쏟아냈습니다.
“재판장님! 죄명이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장애인위계등간음)’으로 중한 범죄입니다. 징역 1년 6개월이면 그 자체도 약한 것은 아닌데요. 그나마 피고도 지적 장애가 있어서 감경을 받은 게 그 정도인 겁니다. 그러니 중한 범죄로 중한 처벌을 받은 만큼 그 위중한 정도가 위자료 액수에 상당히 반영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재판장님, 보시다시피 피고측은 범죄를 아직도 부인하고 있습니다. 원고측은 성폭력 사건도 충격이었지만 지난 1년간 형사재판을 하면서 피고측의 몰상식한 태도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민사재판에서 다시 똑같은 주장을 하면서 피해자를 괴롭히고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점을 위자료 증액사유로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님! 어차피 피고는 자력도 없습니다. 피고에게 설령 잘못이 있다 해도 징역 1년 6개월씩이나 수형생활을 할 정도인가는 의문입니다. 수형생활 마치고 나오는 것으로 책임은 다 할 것입니다.”
2.
여러분, 부글부글 끓어오르시지요. 그게 아니라 너무 답답하시다구요?
네,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있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를 법정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제가 담당했던 민사 손해배상 사건의 첫 변론기일이 열렸던 법정에서의 상황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당사자들 보호를 위해서 어느 정도 각색을 해서 이야기를 해 나가고 있으니 그 전부가 실제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일부는 사실에 토대해서, 일부는 제가 적절히 허구를 가미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 제가 교정 단계의 회복적 사법 이야기를 한다고 해 놓고, 왜 또 다시 재판 장면이냐구요?
이 부분도 미리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이번 회부터 교정 단계의 회복적 사법 이야기를 하기로 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재판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하면, ‘왜 교정 단계의 회복적 사법이 필요한가’를 말하기 위해서, ‘왜 형사재판 단계까지는 회복적 사법을 할 수 없었는가’를 말해야 하기 때문인 거죠.
즉, 이 사건은 ‘형사재판 단계까지’, ‘형사재판의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회복적 사법의 접근을 할 수 없었던 사건인 겁니다. 가해자가 고소를 당해서 수사를 받는 신분일 때는 ‘피의자’,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고 있을 때는 ‘피고인’, 드디어 형사재판이 끝나고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형이 확정된 다음 교도소의 ‘수형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그 피해자가 ‘원고’가 되어 가해자를 ‘피고’로 삼아 민사상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하기 위한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위자료로 총액 5,000만 원을 청구했습니다. 그 피해자의 부모 또한 공동으로 ‘원고’가 되어서 말이죠.
물론 형사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이 피고인은 구치소에 ‘(미결)수용자’로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형이 확정되었기에 ‘(기결)수용자’, 즉 ‘수형자’ 신분이 된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스무 살 우성이는 사귀던 사이인 동갑내기 진희의 집에서 진희와 성관계를 가지고서 진희와 진희 부모로부터 고소를 당해서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장애인위계등간음)죄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이 확정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수형생활을 하는 교도소 수형자입니다. 그리고 이제 진희와 진희 부모로부터 민사상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피고가 된 겁니다. 우성이 부모는 피고는 아닙니다. 물론 형사재판의 피고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성이가 겪은 형사절차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했고 지금 우성이가 당한 민사소송의 방어를 실질적으로 하고 있는 분들인 것이죠.
저는 진희와 진희 부모의 우성이에 대한 민사소송의 담당재판장이었습니다. 이 민사재판에서 진희 부모와 우성이 부모 사이의 분쟁을 회복적 사법적으로 접근했던 경험을 가지고 여러분과 ‘교정 단계의 회복적 사법’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 당시 피해자 본인인 진희나 가해자 본인인 우성이는 만나보지도 못했고, 단지 민사소송의 원고‘측’과 피고‘측’으로서의 진희 부모와 우성이 부모 사이에서 제한적으로만 회복적 시도를 했었습니다. 그마저도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앞서 보여드린 법정장면에서 눈치 채셨을 겁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형사판결 확정 후 피·가해자간 민사소송의 담당재판장으로서 어떻게든 제도적 틀 내에서 할 수 있는 회복적 사법을 시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시 제도적 한계 때문에 다루지 못하거나 더 접근하지 못한 영역들에 대한 아쉬움과 문제의식이 많이 남았던 사건이었습니다. ‘교정 단계의 회복적 사법’이 정말 필요하구나 하는 인식이 생겼던 것은 물론, 과연 어떻게 그것을 교정 단계에서 가능하게 할까, 교정 단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도되어야 하고 어떤 형태로 제도화되어야 할까 하는 질문들도 생겨났습니다.
3.
다시 우성이와 진희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니, 유죄판결이 ‘확정되든 말든’ 인정 못하겠다고 했던 우성이와 우성이 부모의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성이에게 유죄가 선고된 범죄사실이 대체 뭔데 인정을 못 한다고 했던 걸까요.
형사 판결문에 써 있는 범죄사실은 간단했습니다. 지적 장애가 있는 피고인인 우성이가 지적 장애를 가진 동창생 진희와 연인 사이였는데, 어느 날 진희네 집에서 진희와 함께 있다가 진희의 얼굴과 몸을 만지고 옷을 벗겼습니다. 진희가 그때 ‘하지 마’라고 한번 말을 했지만 우성이는 계속하였고, 진희가 그냥 가만히 있는 동안 우성이는 진희와 성행위를 하였습니다. 범죄사실에는 “피해자는 평소 피고인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화를 내므로 피고인이 화를 낼 것을 두려워하여 가만히 있었다. 이로써 피고인은 위력으로써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피해자를 간음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어, 이게 왜 범죄야? 하는 분이 계실 수 있어요. 우성이가 진희를 때린 것도 아니고 위협한 것도 아니고 연인 사이에 그냥 성행위를 했는데 이게 왜 범죄가 돼?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거에요.
여러분, 만약 때렸거나 위협을 해서 성행위를 했으면 그것은 명백히 ‘강간’이 되는 것이구요. 이 사안은 그 정도에 이르지 않았지만 ‘위력’을 행사해서 성행위를 했기 때문에, 게다가 그 대상이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이라고 약칭하기도 합니다) 제6조 제5항의 장애인에 대한 위력 간음죄에 해당한 겁니다.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된 범죄입니다.
여기서 ‘위력’은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력’으로써 간음하였는지 여부는 행사한 유형력의 내용과 정도나 이용한 행위자의 지위 또는 권세의 종류, 피해자의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인 행위 태양, 범행 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우성이는 평소 진희와 사귀면서 잘 대해주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말을 진희가 잘 들어주지 않을 때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서 거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진희는 우성이가 무엇인가 요구하거나 진희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거절하면 우성이가 화를 내고 거칠게 대할 것이 무서웠습니다. 진희가 분명히 ‘하지 마’라고 말을 하였지만, 우성이가 그 말을 무시하고 행위를 계속하자, 진희는 더 거절하면 우성이가 화를 내거나 거칠게 대할 것이 두려웠고 그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죠. 형사재판에서 여러 증거를 놓고 다각적으로 심리한 결과 결국 진희는 그 당시 우성이의 위력에 제압된 상태였다고 판단된 겁니다.
아니, 그럼 우성이 입장에서는 진희가 가만히 있기만 하는데, 연인으로 좋아서 가만히 있는지, 싫어도 위력에 제압당해 가만있는 건지, 대체 어찌 알 수 있겠느냐구요? 진희가 ‘가만히 있기만’ 하지 않았잖아요. 진희가 분명히 ‘하지 마’라고 말을 했잖아요. ‘하지 마’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하는 거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행위로 나아간 우성이가 당시 감수했던 것은 결국, ‘하지 마’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상대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이를 감행하겠다는 선택과 그 실행인 것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범죄적 고의(적어도 미필적 고의)이고 가벌성도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잘 이해가 안 가신다구요? 반면, 오히려 피해자 입장에서 우성이의 행위에 정말 화가 나고 그런 우성이의 행위가 범죄가 된다는 것을 왜 납득하지 못하는지가 더 이해가 안 간다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영역은 아직 우리 사회 내에서 남성과 여성, 젠더적 관점에서의 인식 차가 크고, 게다가 진희의 경우 지적 장애까지 있는 피해자이다 보니 그 피해호소를 일반적인 기준에서만 접근하면 오히려 피해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영역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가해자인 우성이도 지적 장애가 있다 보니, 우성이와 진희 사이의 의사소통이나 평소 관계, 당시 각 행위의 의미 등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은 영역이기도 하구요.
진희는 그 일이 있은 후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극심한 모멸감과 고통, 수치심을 느겼고, 얼마 후 부모가 알게 되었습니다. 진희의 부모는 진희를 데리고 곧바로 고소장을 접수시켰습니다.
하지만 우성이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고, 우성이 부모는 아들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쪽이 아니라 성범죄로 고소당했다는 사실 쪽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황 설명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도 대체 어느 대목이 성폭행이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성이가 구속이 되자, 강력한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고통스런 맘을 추스리며 다짐을 했습니다. ‘대법원까지 가는 한이 있더라도 억울한 우리 아들을 반드시 구해내자!’
(다음 회에 계속)
임수희 부장판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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