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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진중권 교수의 독설, 김은정 시인은 “그랑께나가 내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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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진중권 교수의 독설, 김은정 시인은 “그랑께나가 내 말은”
  • 오시영
  • 승인 2020.01.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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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독설은 로고스(logos)를 걸어 잠그는 마지막 열쇠이다. 독설은 논리의 마지막 무너짐이다. 독설에는 로고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파괴, 분노, 저주가 포함되어 있다. 논리로 상대방과 대화하는 동안은 독설이 필요하지 않다. 논리로 충분히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방 논리에 대해 자신의 논리로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논리가 무너지는 그 한 교차점에서 독설은 송곳처럼 삐져나오게 된다. 독설에는 스스로 취하게 만드는 알코올 성분이 있어, 독설을 퍼부으면서 스스로 취해버린다. 그 독설이 취한 자리에 더 한 독설이 자리 잡고, 더 한 독설이 자리 잡은 곳에 심한 갈증이 찾아와 더욱 독설에 취하는 자가만취의 상황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만취자는 언제나 한 마디 마지막 말을 잊지 않는다, “네가 내 진심을 알아? 아느냐고?”. 까닭에 독설에는 상대방 심장을 후벼팜과 자신의 영혼이 짓이겨 찢기는 이중의 고통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진정한 독설이라면 말이다.

김은정 시인의 “그렁께나가 내 말은”이라는 시를 새해 아침 함께 산책해 보았으면 한다. “우짜모 좋노?/그랑케나가 내 말은// 이렇게 설명하고 저렇게 설명하지만/ 우리 서로의 낱말이 달라/ 우리 서로의 어순이 달라/ 곧게 알아듣지 못하고 얼굴만 마주 보고 어안이 벙벙//가령,// 그대: 우리 다시 만날까요?/ 나: 언지예!/ 그대: 11월 둘째 주 휴일 어때요?/ 나: 오대예!/ 그대 : 지금 만난 이 장소면 좋겠지요?// 어휘가 달라도 몸의 말에 귀 기울이면 되는데/ 온몸과 목소리 그 표정을 책 읽듯 꼼꼼히 훑으면 되는데/ 말을 하고도 표현을 해놓고도 그대와 나는/ 기대하고 설레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지예는 아니요, 오대예도 아니요/ 그런 뜻인 걸 그대가 모르는 줄도 모르고/ 언지예가 언제요, 오대예가 어디요/ 그렇게 그대가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내가 또 모르고// 게다가/ 언지예, 오대여, 그런 말이/ 한 번쯤 참하게 거절해 간절한 이의 애를 끓게 하는/ 매우 전형적인 장난기 가득한 순정의 대사라는 것을/ 그대가 모른다는 사실을 내가 온전히 모르고// 그러니 우짜모 좋노!/ 그랑께나가 내 말은” (전문, 시집 ‘일인분이 일인분에게’에 수록, 푸른사상, 2015 간).

우리 모두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대화자 상호간의 이해와 해석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그 다름의 간격을 건너뛰지 못한 채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며, 찢긴 상처의 강을 꿰매지 못한 채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다. 진영 간의 갈등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자기 진영만이 선이고, 타 진영은 악이 되어 버린 이분법의 세상, 거기에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있다. 김은정 시인은 말한다. “언지예!”라는 말이 “아니요”라는 거절의 말인데도 상대방은 “언제요?”라는 긍정의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오대예!”가 안 된다는 말인데도 상대방은 “어디요?”라고 승낙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화자는 부정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긍정으로 받아들이는 이 현실은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인가? 더 슬픈 일은 화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부정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고, 상대방 역시 자신의 긍정을 화자가 부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진영논리가 이렇지 않나 싶다.

그러면서도 김은정 시인은 해결책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언지예, 오대여, 그런 말이 한 번쯤 참하게 거절해 간절한 이의 애를 끓게 하는 매우 전형적인 장난기 가득한 순정의 대사라는 것을 그대가 모른다는 사실을 내가 온전히 모르고” 있으니, 다시 말해 화자의 한 번쯤 거부가 최종적 거부가 아닌 다시 한 번의 은근한 권유를 기다리는 수줍은 긍정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 달라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휘가 달라도 몸의 말에 귀 기울이면 되는데, 온몸과 목소리 그 표정을 책 읽듯 꼼꼼히 훑으면 되는데”라며, 말을 했으면, 표현을 했으면 소리로만 듣지 말고, 눈으로만 보지 말고, “몸의 말”을 통해, 전력을 다해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복잡하고 속도만이 추앙 받는 사회에서 그렇게 은근슬쩍 말속의 뼈를 찾고, 뼛속의 말을 찾는 노력을 누가 하고 있겠는가? 독설이 난무하는 까닭이다.

진중권 교수의 독설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8일 검찰 고위간부인사 직후 페이스북에 추미애 장관의 검찰인사에 대해 “미친 세상”이라고 혹평하며, “감정 에너지 소비할 것 없다. 그냥 세상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저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를 내자.”라면서 “윤석열 검찰총장,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버티세요”라며 “알아서 나가라는 얘기인데 절대 물러나면 안 된다”며 “수치스럽고 모욕스러워도 나라를 위해 참고 견뎌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단단히 뿔이 난 상태에서, 물론 본인은 굉장히 냉정하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글을 올렸다고 생각하겠지만, 최근 자신의 동양대 교수직 사표 이후 계속하여 거침없이 자기 견해를 밝히고 있다. 나아가 “더불어민주당은 ‘그렇다고 너희들이 자유한국당 찍을 거냐?’고 하겠지만 한국당 안 찍어도 된다. 민주당 보이콧만으로도 박빙 지역에선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서 “하지만 선거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한 장의 표로 우리가 매우 화가 났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도 못 하면 정말 바보다. 누가 되든 신경 쓰지 말라. 어차피 똑같은 짓 하는 것 보지 않았나.”라고 자신이 몹시 화가 나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자기 국그릇 엎어 자신이 배를 곯고 상대방에게 어부지리를 안겨 주어도 무방하다는 극단적 자기 파괴 논리는 스스로를 시대의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진 교수가 내뱉을 말은 결코 아니다. 이런 독설은 자기모순의 극치일 뿐이다.

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진중권 교수가 내뿜는 저 말들이 김은정 시인의 “언지예! 오대여!”라는 말처럼 들려오는 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 교수를 향해 “변절했다.”거나 “보수진영으로 전환”하려는 자기 변신의 길을 선택했고, 그러는 중간역쯤에서 허물을 벗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고 있으나, 필자의 눈에는 로고스의 마지막 문을 걸어 잠그기 직전의 “언지예! 오대여!”를 부르짖고 있는 형국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을 한 번 진중하게 생각해 볼 것을 진 교수에게 권한다. 진 교수의 말 중에 상당 부분은 맞는 말일 수 있다. 왜 진보진영이라고 해서 나쁜 놈이 없겠는가? 이쪽저쪽 가릴 것 없이 나쁜 놈은 일정 비율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인간도 없으며, 완벽한 제도도 없다. 다만 “칼을 든 집행자”만 있을 뿐임을 진 교수도 잘 알리라 본다. 칼은 칼집에 넣어져 있기를 바라겠지만, 인간은 그 칼을 뽑아 자기 손에 쥐고 휘두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누군가, 그 누군가가 내 편일 수도 있고 남의 편일 수도 있지만, 그 누군가는 칼을 들고 휘두르는 집행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그 수행자가 내 편이어서, 그래서 완벽한 선함의 경지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지만, 가장 바람직한 로고스의 상태가 되겠지만, 세상이 어디 그리 완벽한가 말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길은 작고 좁은 외줄타기가 아니다. 넓은 길을 많은 사람이 별의 별 형태로, 복합적으로 하나가 되어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를 것이고,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비난받을 일을 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옳은 일을 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다만 전체적인 방향이 서로 결탁하여 부정의 총량을 키워 이를 함께 나누어 갖자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저지른 자를 사전에 차단하려 애쓰고, 사후에 발견되면 이를 제거하여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는 상황이라면 이를 지나치게 절망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드러나는 치부들을 전부인 양 확장 결론짓는 것은 로고스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반화의 오류”를 가져올 수도 있다.

진중권 교수가 지금 어떤 마음일지 미루어 짐작한다. 100%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진중권 교수는 지난 9일에도 “한국당 몰아낸다고 적폐가 사라지는 거 아니다. 그 자리에 바로 민주당 적폐가 자리 잡는다.”고 주장하면서 “촛불사기 더불어민주당만 안 찍으면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서 진 교수의 진정성이 무너지고, “극단적 미학 부재의 파괴”를 보기 때문이다. 정치는 “최고”가 아닌 “차선”의 선택이 강요되는 영역일 수밖에 없다. “지고지선의 영역이 정치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영역은 “로빈슨 크루소의 외딴 무인도”에나 있을지 모른다.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혼자인 세상, 그 세상에서는 통치지의 모든 것이 피통치자의 모든 것이고, 피통치자의 모든 것이 통치자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정치”가 가능할 수 있겠지만(물론 그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주관적인 것일 뿐으로 객관적으로 완전무결한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이상의 사회에서는 그런 주관적 완결무결한 정치마저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이가 진중권 교수 자신일 것이라 믿는다.

진중권 교수는 다시 “우리에게는 한 장의 표가 있다. 그 표를 어디에 던질지는 각자 알아서들 하시되, 다만 한 가지 절대로 쟤들한테 주지는 맙시다.”라고 적고서는 “그래도 옛날엔 잘못하면 미안해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요즘은 잘못한 놈은 떳떳하고 떳떳한 놈이 미안해 해야 한다. 조국 사태 이후,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경험한다. 이 부조리극은 문재인 대통령의 창작물이다.”라며 마지막 화살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돌리고 있다. 진중권 교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냐면 자신의 선동 같은 주장에 유권자들이 따를 것이라는 오류이다. 또 하나는 유권자 역시 모두가 지성적, 이성적 투표행위권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성적, 이성적 투표행위를 판단하는 것 역시 모든 사람에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절대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 존재하지 아니한 절대적 가치를 모든 주체가 각각 하나씩의 절대적 가치를 창조하여 이를 부둥켜 안고 행동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결코 집단적 절대적 옳은 선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결과가 응집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학자로서, 법적 평가보다 도덕적 명제에 더 천착하는 연구자로서 진 교수가 바라보는 현실세계는 온통 추접스러움과 치욕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이쪽 진영에서 바라보던 저쪽 진영이 너무 썩어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실현이 이루어졌더니, 이쪽 진영 역시 썩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좌절감이나 절망감은 믿었던 것 이상으로 크겠지만, 그런 상호 정권 교체의 과정을 통해 역사는 선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리라 믿는다. 요즘 진 교수의 심리 저변에는 “조급함과 짜증”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그 조급함과 짜증의 유발점이 물론 자신이 선하리라 믿었던 진영에서부터 비롯되었음도 이해한다. 그렇더라도 표현 방식이 로고스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다른 사람더러 하라 하고, 미학자는 미학자로서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김정은 시인이 “그러니 우짜모 좋노!/ 그랑께나가 내 말은”이라는, 안절부절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 교수로부터 “징그럽게 보이는 586세대들”도 정신차렸으면 한다. 당신들은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나쁜 짓을 많이 하였기에 저렇게 진 교수가 넌더리를 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나쁜 짓 하지 말기 바란다. 나쁜 짓 하라고 촛불혁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신들에게 정권의 주류가 되라고 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34세의 핀란드 여성총리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는 젊은 대통령이 나올 날이 있을 거니 억지로 역사의 시계를 앞당기려 하지 맙시다. 성군 중의 성군이라 칭함 받는 세종대왕도 만 21세에 조선의 4대 임금이 되어 수많은 치적을 올렸으니, 사실 나이는 별 의미 없잖아요? 문제는 능력이 있느냐이고, 그 능력을 세상이 알아주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겠지요.

모두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새겨듣지 않고 거꾸로만 해석하려는 세상, 김은정 시인은 혼자 애가 타 “그러니 우짜모 좋노!/그랑께나가 내 말은”이라고 시의 첫 연과 마지막 연에서 반복하고 있다. 독설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어휘가 달라도 몸의 말”에 귀 기울이면 된다는 김은정 시인의 해결책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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