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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판사와 함께 나누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 (28)-화해에 관한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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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판사와 함께 나누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 (28)-화해에 관한 오해
  • 임수희
  • 승인 2020.01.1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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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부장판사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임수희 부장판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판사님은 왜 회복적 사법을 재판에 적용해 보고 싶은 건데요?”

이 질문은 제가 받은 것이 아니라 제가 던진 것이었어요. 얼마 전 친한 판사님 한 분이 저에게 형사재판에서 회복적 사법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은데, 무얼 어떻게 해 보면 좋겠느냐고 물으셨거든요. 그에 대해 제가 도리어 그 이유를 여쭌 것이죠.

“글쎄요.”

그 판사님은 자신도 딱히 그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어요.

“그럼 판사님은 무엇을 위해서 회복적 사법을 해 보고 싶으신 거예요? 회복적 사법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목적 같은 거요. 회복적 사법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다시 여쭈었죠. 그 판사님은 곰곰 생각하더니 말씀하셨어요.

“화해?”

그 판사님이 대답하는 말의 꼬리가 채 닫히기도 전에 제 입에서는 갑자기, “어! 그건 아니에요!” 라는 말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전 화해란 말 진짜 싫어해요!” 저도 모르게 이 말까지 덧붙여 버렸어요.

<임수희 판사와 함께 나누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법률저널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 온지 어느덧 2년이 넘어가면서 이제 스물여덟 번째나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얼마 전엔 여러분과 나눈 이야기들을 모아 <처벌 뒤에 남는 것들 - 임수희 판사와 함께하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오월의봄)>라는 책까지 내게 된 제가 ‘화해란 말이 싫다!’는 커밍아웃으로 오늘 이야기를 열어 봅니다.

네, 전 솔직히 ‘화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화해’라는 단어를 대할 때 제 안에 일어나는 감정들의 호불호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긍정적인 것 보다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아요.

놀라셨나요? 살짝 배신감도 드신다구요? 적어도 회복적 사법을 말하는 사람이 화해가 싫다면 어떡하냐구요?

네, 그럼 여러분께도 한번 여쭈어 볼게요. 여러분은 ‘화해’란 말이 좋으신가요?

잠깐 눈을 감고 가만히 침묵 안에 자신을 놔두고 ‘화해’라는 단어를 꺼내어 마음속에 떠 올려 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무슨 마음이 드시나요?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올라오나요?

따뜻한 느낌이 들고 편안해 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지시나요?

장담하건대 여러분들 중에 상당수가, 의외로 가슴이 콱 막힌 듯 얹힌 듯 답답하거나 뭔가 갑자기 억울한 느낌이 훅 올라오거나 지나간 일의 어떤 사람이 떠오르면서 슬그머니 화가 나는 걸 경험하실 거라고 봅니다.

분명 어떤 분은 갑자기 마음속에서 ‘난 못해!’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리는 걸 듣고 깜짝 놀라기도 하실 거라고 봐요. 그와 동시에, 내가 이미 묻기로 하고 잊기로 했던 아주 오래전 어떤 일과 어떤 사람 생각이 이렇게 감쪽같이 살아서 아직도 내 맘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단 말인가 하는 충격도 함께 느끼면서요.

어떠세요? 진짜 그러셔서 놀라우시다구요? 제가 화해가 별로라고 커밍아웃하는 걸 본 거보다 더 놀라우시다구요? 자신이 그렇게까지 화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셨다구요?

네, 저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자신도 알게 모르게 숨기고 있을 뿐, 사실은 화해라는 단어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를 않아요. 왠지 거북하거나 부담스러울 때가 많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오면서 실제로 진짜 화해를 해 본 적이 별로 없고, 화해를 제대로 보거나 접해 본 적도 드무니까요. 살아오면서 화해라는 것을 경험하고 화해라는 말에 긍정적 감정을 쌓아 올 그런 기억들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 화해하란 말을 정말 많이 듣습니다.

“친군데 좋게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라!”, “아는 사이에 그냥 좋게 화해하세요!”, “한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데 이런 일에 뭐 서로 얼굴 붉힐 것 없이 그냥 좋게 화해하고 덮고 넘어가세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잖아! 그냥 좋게 화해해!”, “언제까지 이렇게 꽁하고 있을 거예요? 그냥 좋게 화해하고 잊어야지!”

화해해야 한다, 화해해라, 화해는 좋은 거다, 화해를 잘 해야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화해해야 사회생활이 원만하다, 어찌 보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화해란 늘 강요되어 온 어떤 것이 아닐지요.

좋게 화해해라, 좋게 화해해라, 반복해서 말을 듣지만, 사실은 나는 그놈의 화해가 무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대체 ‘좋게 화해’한다는 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잘 알지도 못하겠는데, 그럼에도 어쨌든 화해는 무조건 해야 할 것 같고, 화해를 못하면 내가 부족하거나 모자란 사람 같고, 혹은 화해 안한 상태로 계속 껄끄럽게 있는 그 상태 자체가 너무 불편하고 피하고 싶고, 그러니 억지로 대충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서는 화해를 한 셈 쳐버린 채 살아오지는 않았는가요.

저는 그런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분쟁을 다루는 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회복적 사법에 관심이 있어 파괴된 관계의 회복을 도모해야 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일이 가끔 있다 보니, 오히려 내가 그동안 얼마나 화해경험이 빈곤했었나, 내가 얼마나 화해를 알지 못하고 있는가, 게다가 내가 그동안 얼마나 화해를 강요당해왔고 스스로 내적으로도 자신에게 화해를 강요하는 마음을 가져왔던가, 그 때문에 오히려 얼마나 강하게 화해라는 말에 거부감이나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자각할 기회가 있었을 뿐인 것이지요.

여러분, 위와 같은 의미의 ‘화해’를 우리는 꼭 해야 하는 것일까요? 무조건 화해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일까요? 게다가 회복적 사법은 화해가 목적인 걸까요? 우리는 부담스러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화해를 꼭 해야 하고 그런 화해를 하기 위해 회복적 사법도 해야 하는 걸까요?

이왕에 서로 솔직히 커밍아웃한 김에 조금만 더 우리 마음을 들여다볼까요? 네, 이참에 우리 각자 자신과 ‘화해’란 단어 사이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라도 좀 더 진솔히 자신이 ‘화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봅시다.

화해란 말 자체가 좋은 말이고, 또 어려서부터 잘 화해하라고 교육을 받으며, 조직이나 사회에서 잘 화해하는 것이 인격적·도덕적인 것으로 평가되거나 최소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생활을 잘 해나가는 사회적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화해를 겉으로 드러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둘러싸고 갈등이나 분쟁이 생길 때 실제로 화해라는 선택지를 얼마나 실질적으로 고려하여 행위할까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갈등이나 분쟁에 대해 저마다 반응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문용갑 박사님의 <갈등조정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는 쉬바르츠(Schwarz, G)의 <갈등관리(Konfliktmanagement)>(1990)에서 인용해서 인간이 갈등을 해결해 온 6개 모델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도피, 상대방 제거, 정복, 제3자 위임, 타협, 합의의 6가지 모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여기서의 ‘해결’은 진정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처리’ 정도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만, 도피는 갈등을 피해버리는 것이고, 상대방 제거나 정복은 강자의 일방적 승리이며, 제3자 위임이나 타협은 갈등의 잠정적 봉합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 해결은 될 수 없는 것이고, 합의는 상호 만족하는 해결점의 일치를 찾는 걸 겁니다. 이것들 중 어느 것들이 화해와 친할 수 있을까요.

도피, 상대방 제거, 정복, 이 세 가지는 개념 자체로 화해와 양립하기 어려울 것이고, 합의, 타협은 그와 더불어 화해까지 가능한 경우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제3자 위임의 경우는 어떨까요. 갈등당사자보다 우위에서 거리를 두고 전체 상황을 보면서 중립적으로 일정한 기준에 따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제3자에게 결론을 맡기는 경우, 그 결론에 따를 때 당사자들이 화해까지 할 수도 있겠지만, 화해와는 전혀 상관없이 종국시킬 수도 있겠지요.

국가가 주관하는 사법절차가 대표적인 이 제3자 위임 방식의 분쟁해결방법일 것입니다. 민사재판이든 형사재판이든 절차를 밟아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당사자들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화해까지 하나요? 아닌 경우가 더 많겠지요. 오히려 분쟁해결을 제3자에게 맡긴다는 선택을 할 때 이미 화해는 안하기로, 화해와는 반대 방향으로 관계를 가져가기로 마음먹고 소 제기나 고소·고발을 한 후 판결이 확정되면 영원히 결별을 해 버리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위와 같은 갈등해결모델 중에 우리는 통상 무엇을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나요? 합의나 타협은 그것을 선택하더라도 그 결론에까지 이르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합의나 타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과 상당한 능력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것을 선택하고 싶어도 결국 제3자 위임이나 도피의 결과로 밀려올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상대방 제거나 정복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차치하고 그 방법을 취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힘 있는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닐 것이구요.

결국 우리는 실제로 우리를 둘러싼 갈등에서 효과적인 해결책을 별로 찾지 못한 채로 분쟁의 물길 위에서 표류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화해적 해결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내적 압박감만 가지고 있다가 분쟁을 회피하거나 제3자에게 결론을 맡기고서 대충 화해한 것으로 퉁치는 외형을 취해 왔다면 결코 ‘화해’를 좋게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특히 피해자들은 ‘화해’라는 말을 들을 때 격분하고 억울해 하는 모습을 종종 보입니다. 원래의 가해로 인해 받은 피해보다 그 후 제3자로부터 들은 ‘화해’라는 말에 더 상처를 받고 심지어 폭력으로 여기는 것도 봅니다. 화해를 어떤 방식으로 권유 또는 제안하든 무조건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을 종종 봅니다.

게다가 문제는 분쟁에서 피해자가 한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거의, 아니 늘 양쪽이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형사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중 억울해 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명도 못 보았습니다. 물론 아직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이니 그럴 수 있지요. 그 중에는 무죄판결을 받기도 하구요. 하지만 유죄판결로 형벌이 확정되어 교도소에서 징역을 사는 수형자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분들은 전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억울해하면서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수형자가 있었는데, 그는 갓 스물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고 지적 장애가 있었어요. 역시 지적 장애가 있던 여자친구를 강간한 죄로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지요. 이 청년은 자신이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진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는 동안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형이 확정되었을 때에도 자기가 왜 유죄인지 납득하지 못했어요. 그 청년 뿐 아니라 그의 부모까지도요. 그러하였기에 피해자와 그 부모는 그 청년과 그 부모로부터 피해배상은 물론이고 잘못인정은커녕 오히려 원망만 듣는 것에 격분하고 깊은 상처를 입었지요. 그리고 유죄판결이 확정된 후 그제서야 수형생활을 하는 청년을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하게 됩니다.

교도소에 수감된 수형자와, 그때까지 잘못인정도 아무런 피해회복도 받지 못한 피해자, 고등학교 때부터 한반에서 친구로 지내다 여친, 남친으로 사귀던 사이였던 이들 사이에서 이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차피 한쪽은 형이 확정되어 징역 살고 나와야 하고, 한쪽은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만 받으면 되니까, 이들 ‘사이에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각자 자기 길을 가면 되는 것일까요. ‘사이에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걸까요. 여기서 회복적 사법적인 접근을 한다면 무얼 의미하고, 의미해야 하는 걸까요. 회복적 사법과 함께 갑자기 ‘화해’라는 단어를 꺼내들어도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사안에서는 ‘화해’란 말이 그 피해여성과 청년에게 단지 또 다른 ‘폭력’이 될 뿐일까요. 혹은 추구해야 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밀어붙여져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화해는 아예 배제되어야 하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경찰, 검찰, 법원의 회복적 사법 이야기를 거쳐 와서, 이제 교정단계의 회복적 사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저 청년과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고서는 당최 어려워서 글이 써지지를 않아서 ‘화해’ 이야기로 시작을 해 보았어요. 화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제가 교도소에 성범죄로 수감된 한 청년과 그 여자친구였던 피해자에 관한 회복적 사법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다음 회에서 만나보시죠.

임수희 부장판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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