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업 변호사의 법과정치(135)-친생 추정과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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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의 법과정치(135)-친생 추정과 유전자
  • 강신업
  • 승인 2019.11.0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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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그리스의 임신부들이 제우스에게 몰려가 “임신과 출산, 양육이 모두 여성의 몫이고 남자들은 아무 할 일이 없으니 이는 남녀 차별이 아니겠습니까? 진통만이라도 아이 아버지가 맡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제우스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이 청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임신이나 출산과 달리 진통은 ‘아이 아버지’의 몫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임신부가 남편의 해외여행 중에 해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진통을 엉뚱한 옆집 남자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이는 태어났다. 그렇다면 아이의 법적 아버지는 누구인가?

우리 민법은 ‘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자녀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혼인 생활 중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이른바 남편의 ‘친자식’으로 본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모자관계’는 출산이라는 사실에 의해 친자관계가 바로 증명되지만 부자관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민법은 부부가 별거하는 등 외관상 부부의 아이로 볼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부부가 혼인 중에 낳은 아이는 부부의 아이로 일단 추정하고 나중에 어떤 이유로든 부부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날로부터 2년 동안 친생을 부인하는 소를 통해서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다투게 하였다.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을 2년으로 정한 것은 다툴 수 있는 기간을 너무 길게 하거나 그 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면 신분 관계를 둘러싼 법적관계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인간이 아이를 해산할 때 친아버지가 진통하도록 했더라면, 세상에 친생자 추정 규정은 굳이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진통도 여인의 몫이 된 이상 친생자 추정은 어쩌면 인간 사회의 숙명 같은 것이다. 특히 친생자추정은 진짜 아버지 여부를 밝힐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법적 신분관계를 조속히 안정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늘날은 유전자 검사 기술이 발달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혈연관계 존재 여부를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유전자 조사만 하면 언제라도 친자관계 여부를 명확히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혼인 생활 중에 낳은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아이라고 추정하고 또 소를 통해 다툴 수 있는 기간도 2년만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답을 주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최근 나왔다. 1985년 혼인한 A씨 부부는 자녀가 없었는데 A씨의 무정자증이 원인이었다. 이후 A씨의 아내는 혼외관계를 통해 1997년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A씨의 자녀로 출생신고가 됐다. A씨는 2013년 이혼 소송 과정에서 1997년 출생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은 소송 중 A씨는 양육비 요구를 받자 아내가 혼외관계를 통해 낳은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법률상 친자식으로 추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오늘날에는 혈연뿐만 아니라 ‘가족공동생활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형성된 친자관계’가 중요한 가치를 지니므로 이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판결에 대해서는 유전적으로 친자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경우까지 친자관계를 법으로 강요하게 되면 자녀 보호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친자가 아님을 알았음에도 부의 역할을 강요받는 자의 행복추구권을 심하게 훼손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인지나 인지청구의 소를 통해 혈연관계에 따른 친자관계를 형성하고 싶어 하는 아이와 친아버지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사실 친생자 추정 규정은 그리스 신화 속 남편의 진통과 같이 친부를 밝힐 방법이 없던 상황에서 아이 아버지를 두고, 또 내 자식인지 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법적 분쟁을 종국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규정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분석을 통해 친부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데도 그 규정을 일률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세상이 바뀌면 법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도 불구하고 관련 규정에 대한 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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