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통상임금 사건과 신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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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통상임금 사건과 신의칙
  • 백태승
  • 승인 2019.08.3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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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승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백태승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민법을 처음 배우면 그럴듯 하고 제일 근사한 조문 중 하나가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다. 신의칙은 말 그대로 법률관계의 당사자는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하여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생활의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표현이다. 신의칙은 민사법의 대원칙이나 법의 일반원칙으로 승격되고 있다. 그런데 신의칙은 그 함축하는 바가 너무나 많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규범이기에 개개의 재판에서 그 가치가 구현된다. 최근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법원은 신의칙을 적용하지만, 개개의 사건에서 하급심과 대법원의 판단이 다를 뿐 아니라 그 기준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판단이 이어지고 있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100인 이상 기업체 중 약 200여 업체가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했고, 심지어 한 기업에서 18건의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한 경우도 있다. 패소하면 기업이 추가로 부담하여야 하는 인건비도 총 10조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더 나아가 한국은행, 산업은행을 비롯하여 금융감독원까지도 통상임금 소송에 휘말리고 있다.

2013년 12월 18일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대법원은 “어떠한 임금이 통상임금에 속하는지 여부는 그 임금이 소정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것인지를 기준으로 객관적인 성질에 따라 판단하여야 하고, 임금의 명칭이나 그 지급주기의 장단 등 형식적 기준에 의할 것이 아니다”라는 기본원리를 분명히 했다. 즉 통상임금인지는 각종 수당의 명칭이나 ‘지급주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금원이 소정 근로의 대가로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된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판시하였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하고 사후 그 무효를 주장하면서 추가로 법정수당을 청구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되는가이다. 대법원은 2013년 갑을오토텍 사건에서 ①정기상여금에 대한 청구로서 ②노사합의 시 정기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식 못 하고 임금총액을 기준으로 임금협상을 했고, ③노사합의에 반하여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될 경우 근로자는 예상 밖의 초과이익을 얻지만 사용자는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되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라는 요건을 갖출 경우 신의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그 요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의칙 적용에서 ‘경영상의 어려움’이나 ‘기업존립의 위태로움’이 신의칙 적용에서 중대한 판단요소로 되고 있어 법원 판단에서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 신의칙은 계약당사자 상호 간에 형성된 신뢰를 일방 당사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깨뜨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기본원칙이다. 따라서 통상임금에서의 신의칙 적용도 임금협상과정에서 노사 간에 형성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가 쟁점이 되어야 한다. 물론 경영상의 어려움은 부차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이후 이어진 사건에서도 주로 경영상의 어려움에만 초점을 맞춰 신의칙 위반 여부를 판단하다가 보니 판단 시점부터 매출액, 영업이익, 인건비, 심지어 충당금의 규모 등 경영상황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제각각이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더구나 회계 분석에 어두운 재판부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는 비판이 가중되고 가뜩이나 재정상황이 어려운 기업에는 결정적인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2019년 회사의 경영상황이 악화된 한진중공업이나 인천 시영운수 사건에서조차 신의칙 적용을 배제하다 보니 그로 인해 통상임금 관련 소송 중인 많은 기업의 경영상 위험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결국 회사가 망할 정도가 아니라면 신의칙 적용을 할 수 없느냐라는 자조적인 탄식이 나오고 있다.

강행법규에 위반되는 합의는 원칙으로 무효지만 그 무효주장을 제한하는 신의칙 적용에서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 검토되어야지 경영상의 위험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신의칙 위반 여부를 판단하면 할수록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이는 마치 신의칙 적용배제 결과 정기상여금을 추가로 지급하면 회사의 재정이 얼마나 어려워지는지 또는 지급하여도 자금 여력이 충분하다는 경영진단을 재판부가 하는 꼴이다. 그것보다 일방이 깨뜨려서는 안 될 협상의 신뢰성과 노사관계의 안정성 여부 등이 신뢰보호의 판단요소로 중시되어야 할 것 있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원칙인 신의칙은 당연히 엄격히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차적인 요소를 본말을 전도하여 중시한다고 결코 신의칙을 엄격하게 적용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노사가 협상 과정에서 형성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판단요소로 우선되어야지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하면 경영상의 위기가 초래되느냐 마느냐 하는 판단이 재판부의 재량으로 남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백태승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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