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판사와 함께 나누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 (27)-응보사법과 회복적 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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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판사와 함께 나누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 (27)-응보사법과 회복적 사법
  • 임수희
  • 승인 2019.07.2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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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부장판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1.
회복적 사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워드 제어는 <회복적 정의 실현을 위한 사법의 이념과 실천>(원제 : The Little Book of Restorative Justice)에서, 먼 미래에 언젠가는 아마도 사법에 대한 모든 접근방식들이 회복지향적으로 될 날이 올 수 있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좀 더 실현가능 하기는, 회복적 사법이 기본 규범이 되고 현행 형사사법제도가 예비적이거나 대안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바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잘 안 오신다구요?

네, 아마 그러실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아직 회복적 사법이 도입도 제대로 안 되고 있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는 형사사법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응보사법을 전제로 생각이 전개되실 텐데, 장차 ‘완전히 회복적 사법으로 된다’라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도 ‘회복적 사법을 기본으로 현행 형사사법(응보적 사법을 말하는 것임)이 예비적 역할을 한다’거나 하는 발상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훅 넘어선 영역의 그것일 테니까요.

하워드 제어의 위와 같은 생각은 어찌 보면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을 우위에 두고 전통적인 응보사법(Retributive Justice)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입장일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회복적 사법과 응보사법의 관계에 관하여 학자들이나 실천가들 사이에는 이와 같거나 다른 꽤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양자를 조화나 절충 관계가 아니라 대립이나 긴장관계로 보는 견해도 있고, 조화든 대립이든 간에 회복적 사법과 응보사법 중 어느 하나를 우위에 두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또한 하워드 제어의 경우 양자를 조화적으로 보면서도 회복적 사법으로 나아가, 먼 장래에는 마치 완전히 대체되어야 할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양자를 대립관계로 보는 견해에서도 역시 회복적 사법이 응보사법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입장도 있으므로, 결국 양쪽 끝의 견해들끼리 결론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2.
지난 회 회복적 사법 이야기 <지역기반 통합 형사조정센터를 꿈꾸며>에서 지역 내에 거주민들의 생활과 밀착하여 존재하면서 형사 절차의 모든 단계, 즉 경찰, 검찰, 법원 등 어느 단계에서든 필요한 경우 이용할 수 있고, 간단한 수준의 합의부터 복잡한 레벨의 회복적 사법 프로세스까지 다룰 수 있으며 관련 분쟁도 함께 처리할 수 있는 전문적 역량을 갖춘 어떤 통합적 형사조정기관에 관한 아이디어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보았는데요.

그러면 그와 같은 지역기반 통합 형사조정센터에서의 회복적 사법적 접근(또는 어떤 형태로든 전통적 형사절차에 결합되거나 적용되는 회복적 사법적 접근)과, 전통적 응보사법적 절차에 의하여 진행되는 종래의 형사사법 절차에서의 사건의 처리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전자는 무조건 좋은 것이고 후자는 지양해야 할 것이라 보고, 하워드 제어의 말처럼 장차 먼 미래에는 전자로만 접근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고 후자는 소멸되어 버릴 것이며, 단기적으로는 전자를 기본으로, 후자는 예비적인 역할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요. 타당한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혹은 현실적 가능성의 문제와 상관없이 당위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질문들을 던져 보시겠습니까.

3.
저는 학자가 아니고 회복적 사법에 관해 깊이 있는 이론적 연구를 하지도 못해서 이에 관해 깊이 있는 통찰이나 비전을 제시할 수는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법원에서 재판실무에 종사해 온 사람으로서 실제 사건들과 사람들을 매일 겪으며 그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가치들을 실제로 접하는 위치에서 여러분들에게 나눌 말씀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제가 회복적 사법을 형사재판에 적용하는 시범실시사업을 하는 과정과, 그 이후 회복적 사법적 요소 혹은 패러다임에 기반해서 관련 재판들을 진행해 본 경험에서 느낀 점들이 있는데요.

이에 관한 아래의 내용은, 작년에 양형연구회 창립기념 심포지엄의 지정토론자로 초대되어 토론문에서 밝힌 바가 있지만, 이 지면을 통해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소개하고 싶습니다.

4.
저는 판사로서 재판을 진행하면서 그 절차, 즉 응보사법적 절차의 본질적 속성을 알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데, 거기에 회복적 사법적 요소를 도입 내지 적용하려고 하자, 사건 하나 하나, 절차의 과정 하나 하나에서 직접 체득하면서 직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회복적 사법은 응보사법이 단단히 자리 잡은 상태를 조건으로 안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회복적 사법이 아무리 잘 된다 해도 응보사법을 밀어내거나 대체할 수 없으며 그럴 이유나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응보사법은 결국 제대로 구현된 회복적 사법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응보사법과 회복적 사법은 수레의 양축처럼 양자가 모두 있어야 하고, 각각 단단히 서야 타방도 단단히 설 수 있으며 형사사법이라는 수레를 제 기능대로 굴러가게 할 수 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좀 더 자세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5.
응보사법은 단지 범죄가 야기한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에게 형벌이라는 고통으로 되갚기만 하는 절차가 아닙니다.

국가에 의해 정립된 응보사법의 핵심은, 고통의 형벌로 되갚는 야만이 아니라, 책임 원칙, 즉 ‘눈에도 목숨, 이에도 목숨’이 아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피해 만큼, 행위 만큼만’ 책임을 지우는 원칙을 확립한 것, 그리고 그 책임의 여부나 크기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없도록 적법 절차를 세워온 것, 이 두 가지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피고인의 인권이 보장되는 적법한 절차에 의한 사실의 확정 및 책임원칙에 따른 엄정한 양형이 안정적으로 수행되는 응보적 형사절차의 확립, 이 자체는 회복적 사법이 도입되든 아니든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중요한 형사사법절차의 원칙과 가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조건 하에서는, 피고인으로서는 응보적 형사책임을 회피할 우회적 수단을 모색하고 실제로 그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때라면, 굳이 피해자에 대한 관계에서 회복적 사법에 따라 더 나아간 책임을 직면하고 떠안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한편 적법절차와 책임원칙이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조건 하에서의 회복적 사법의 적용은, 자칫 피고인의 인권침해로 이어지거나, 피해자가 참여자 지위를 넘어서서 절차를 주도하고 휘두를 위험이 있고 그 결과 종래 형사재판에 의해서라면 국가도 지우지 못할 수준의 과도한 부담이나 처분을 피고인에게 강요하려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응보사법의 확립이야말로 회복적 사법이 가능한 조건이자, 회복적 사법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나아가 응보사법의 확립 하의 회복적 사법의 성공적 구현은,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하여 종래의 형사책임만으로는 다하지 못할 수준으로 더 나아간 책임을 실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소들, 즉 금전적 배상 등은 물론, 정서적, 관계적 회복 등을 포함한 실질적 피해 회복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결국 이는 응보사법의 핵심인 ‘책임’을 더 높은 차원으로 완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6.
위와 같은 견지에서는, 회복적 사법이 응보사법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양자가 분리되어 있지도 아니합니다. 각각 굳건한 영역이 있습니다만 서로가 조건이 되거나 완성시킵니다.

먼 미래에 인류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여 사회 내에서의 인간의 행동 양식을 형벌에 의하여 통제할 필요가 없어지는 때가 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까지 인간 역사가 구축해 온 사회 유지 시스템은 이와 같은 응보 및 용서(회복)를 기반으로 생존해 왔다고 보입니다.

응보가 야만이 아니고 용서가 도덕이 아니라, 응보와 용서(회복) 양자 모두 인간 사회 유지에 필요한(needs) 도구적 요소이자 더 많은 개인이 안전하게 살아남을 인간협력관계의 조건이 아닐까요.

임수희 부장판사 /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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