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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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6.01.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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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남남일 수 없잖아, 이름표를 붙여줘

 

가수 현철 씨의 “이름표를 붙여줘”라는 노래가사가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다름 아니라 시위진압 경찰, 전ㆍ의경에게 이름표를 붙여 시위진압 경찰들에게 자기 이름에 걸맞는 책임감을 심어줌으로써 무리한 폭력시위진압을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가수 현철은 “이름표를 붙여줘”에서 제발 자기 가슴에 이름표를 붙여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자기의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이 세상 끝까지 사랑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확실하게 붙잡아 가슴에 이름표를 붙여달라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러한 노래가사를 들으면서 아, 사랑이 있으면 이름표를 붙이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사랑이 없으면 이름표를 붙이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하는 것도 깨닫게 된다.


투명한 사회일수록 실명제의 의미는 크다. 청사에 이름을 빛낸 사람들은 모두 제 실명을 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하고, 그 이름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부끄러워하고,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한사코 막으려고 한다. 문민정부 시절, 하룻밤 사이에 실시되어 버린 금융실명제 때문에 검은 자금을 운영하던 많은 사람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또한 부동산실권리자명의등기에관한법률이 시행되면서 명의신탁 등 부정한 방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던 사람들이 세금 및 과태료 등의 직격탄을 맞았다. 모두들 이름을 감추고 저지른 탈법과 불법이 제 이름을 찾으면서 겪어야 했던 진통이었다.


시위진압을 하는 경찰관들에게 명찰을 패용시키자거나 고유번호표를 붙이자는 발상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즉흥적이고 무분별한 생각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위대들에게도 이름표를 붙여야 하지 않겠는가? 헌법이 보장하는 시위 및 집회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위 및 집회는 헌법과 관련법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행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대규모 시위는 어김없이 폭력시위로 변질되고 있다. 쇠파이프가 난무하고 깨어진 보도 블록이 날아다닌다. 심지어는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엘피지 가스통이 화염방사기처럼 불을 품어댄다. 예전에 군부독재시절에는 군부독재타도라는, 정의의 실현이라는 대명제가 있었다. 실정법 위반이라는 엄연한 사실조차 천부인권설에 바탕을 둔 저항권보장이라는 헌법정신이 실정법 위반의 위법성을 조각시킬 수 있어서 정당성을 보장받는다는 위법성조각사유의 항변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러한 위법성조각의 헌법적 가치관이 들어올 틈새가 없다. 세계언론인협회 등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언론, 출판의 자유, 시위,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계 1등국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은 지금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시위 다 하고 살고 있다.


시위진압 경찰들의 가족이 시위진압으로 인하여 시위대들로부터 상해를 입은 경찰들의 사례를 전국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그들이 평화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헤겔의 正反合의 기본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이 있으면 반이 있고, 다시 그 반이 어우러져 합을 이루어내는 과정 말이다. 진압경찰 가족들의 그러한 시위와 침해사례 수집을 보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시위문화에 관한 한 合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태까지 정과 반이 어우러져 극심하게 싸웠고, 언론은 대부분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시위를 벌리는 사람들의 절박함 앞에 집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가 부정되던 시대도 있었다. 국가공권력의 정당한 집행에 힘을 실어주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은 양비양시론을 내세워 양쪽을 싸잡아 비난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저항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인정될 만큼 무법천지의 야만국가가 아니다.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사법권이 살아 있다. 적법절차를 밟아 가면 시간은 다소 걸릴지라도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시키는 것이 국가의 이상이자 목표이지만, 국가는 보다 큰 가치와 국익을 위해 작은 가치와 적은 이익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고, 그러한 결정이 합리성이 있다면 우리는 이에 승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희생되는 부분의 피해가 최소화되고, 다른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차선책을 찾아내는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시위경찰관들의 가슴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도 중요하고, 시위대의 가슴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의 행위가 떳떳하다면 말이다. 또 하나 소득관리의 투명성을 위해 자영업자 종업원 소득신고제도의 도입에 대한 납세자연맹의 반대가 조직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지켜보면서도 답답하다. 그러한 신고가 없었던 것은 물론 여태까지의 관행이지만, 그러한 관행은 잘못된 관행임이 틀림없다. 이제 그런 잘못된 관행들을 바로잡아야 할 지적, 문화적 인프라가 갖추어진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소득수준이 투명해지고, 모든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게 되면, 세금포탈자들이야 세금을 추징당하겠지만, 세금 내온 많은 선량한 국민들은 감세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게 정의가 아닐까? 자신의 이름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기분 한 번 내지 않으실래요? 현철 씨, 이름표를 붙여줘” 한 번 시원하게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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